현대그룹으로선 현대증권은 팔고 싶지 않은 계열사다. 2003년 정몽헌 회장이 작고한 후 그룹을 이끌고 있는 현정은 회장(사진)이 크고 작은 경영권 분쟁에 휩싸일 때마다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맡았던 회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그룹은 22일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자구안을 내놓으면서 결국 현대증권을 매물로 내놓기로 했다. 그룹의 중심이자 대북 사업을 사실상 총괄하는 현대상선을 지키기 위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채권 금융회사들은 예상을 뛰어넘는 자구안 발표를 계기로 현대그룹 유동성 우려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자구계획안에 대한 실행 의지와 속도가 중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현대그룹, 3조3000억 자구안] 금융 3社 매각…현정은의 승부수

○예상 웃도는 자구안의 배경

현대그룹이 내놓은 자구안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현대증권·자산운용·저축은행 등 금융 3사 매각이다. 금융부문에서 철수하면 현대그룹은 해운(현대상선) 외에 산업기계(현대엘리베이터), 육상물류(현대로지스틱스), 대북사업(현대아산)만 남게 된다.

지난해 현대그룹의 전체 매출 12조원 가운데 8조원가량을 현대상선이 채웠다. 금융 3사의 매출은 2조원에 불과하다. 즉 매출 기준으로는 큰 타격이 아니다. 하지만 금융부문은 꾸준한 수익을 내는 캐시카우(현금창출원)였다는 점에서 아쉬울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당초 현대그룹은 현대증권 매각에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상선의 자체 구조조정 등으로 위기를 넘기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동양 사태’에 시달린 산업은행 등 채권 금융회사들은 보다 강도 높은 자구안을 요구했다. 팽팽한 줄다리기가 있었지만, 추는 서서히 채권단으로 기울었다. 현대그룹이 지난 10월 산은으로부터 2800억원 규모의 회사채 신속인수 지원을 받은 게 직접적인 계기였다.

여기에 현대엘리베이터가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맺은 파생상품 계약에서 큰 손실을 입으면서 현대그룹의 입지를 좁혔다. 금융회사들에 현대상선 주식을 대신 사게 한 후 현대상선 주가가 일정 이하로 떨어지면 손실을 보전해주는 계약으로 현대엘리베이터는 4000억원 이상의 평가손실을 입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결국 채권단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현대상선 구하려는 고육책

[현대그룹, 3조3000억 자구안] 금융 3社 매각…현정은의 승부수
현대그룹은 올해 현대상선의 부산신항만 크레인 등 자산매각과 유상증자, 사채 발행 등을 통해 1조원 이상의 자금을 마련했다. 올해 만기인 채무를 모두 갚고도 6000억원가량이 아직 남아 있다. 내년에 현대상선의 회사채 4200억원과 기업어음 4000억원의 만기가 돌아오긴 하지만 상반기까지는 상환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3조원대 자구안을 내놓은 것은 확실한 구조조정으로 체질을 바꾸고, 시장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포석으로 볼 수 있다. 지난해 현대상선의 적자 규모가 1조원에 달하고 올해와 내년 실적 전망도 좋지 않아 일회성 대책으로는 시장신뢰를 얻기 힘들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현대그룹은 현 회장이 참석한 지난 16일 사장단 회의에서 고민 끝에 자구계획안 수위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구안에는 그룹의 중심이자 현대아산 지분 66.20%를 가진 현대상선을 확실히 살리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룹 관계자는 “핵심사업의 한 축인 금융을 매각하는 고통이 있지만 그룹 유동성 문제 해결과 함께 핵심 부문에 역량을 집중해 지속성장의 틀을 갖춰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그룹은 이번 자구안이 실행되면 1조3000억원 정도의 부채를 상환해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현대로지스틱스 등 주요 3개사의 부채비율이 지난 3분기 말 기준 493%에서 200% 후반대로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산은 관계자는 “3조원 이상의 자구안을 낸 것은 긍정적이지만 벌크 전용선 등을 실제 매각하려면 다소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내다봤다.

서욱진/이상은 기자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