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사라진 캐럴
지난주 토요일 저녁 미국 펜실베이니아 웨스트 레딩의 한 거리에 수천 명의 군중이 모였다. 곧 이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징글벨’ 등 캐럴이 울려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8세 소녀 델레이니 브라운은 환하게 웃으며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지금 노래가 들려요. 사랑해요.” 백혈병 치료 중인 소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성탄절 캐럴을 합창한 것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캐럴은 이렇듯 사랑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노래다. 영어 캐럴(carol)의 어원은 중세 프랑스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추던 춤 카롤르(carole)라고 한다. 원래는 크리스마스 때만 부르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야외에서 합창하는 종교적인 노래를 통칭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노엘, 독일에서 바이나흐츠리트, 스페인에서 빌란시코로 불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캐럴은 5세기부터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불렸는데 악보 없이 구전으로만 500여 곡이 전해졌다니 놀라운 일이다. 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집집마다 돌며 전하는 캐럴링은 13세기 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마구간 앞에서 춤추며 노래한 것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 또한 역사가 800여년이다.

첫 캐럴집이 발간된 1521년 이후에는 전 유럽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한동안 위축됐다가 19세기 들어 다시 각광을 받게 됐다. 캐럴의 대표로 꼽히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1816년 오스트리아 신부와 음악교사의 작사 작곡으로 탄생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캐럴은 ‘저 들 밖에 한밤중에’, 가장 많이 리메이크 된 캐럴은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요즘은 고전 성가뿐만 아니라 걸그룹이나 개그맨 버전까지 나왔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거리에서 캐럴을 제대로 들을 수 없게 됐다. 세밑 분위기를 한껏 돋우던 캐럴이 사라진 이유는 여러가지이지만, 그 중 하나는 전 세계적으로 강화된 저작권법이다. 3000㎡ 이상 백화점 등 대형 매장은 음악사용료와 공연보상금을 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캐럴 틀기를 주저한다는 것이다. 덩달아 소형 매장까지 지레 캐럴을 포기하고 있다니 안타깝다.

다행히 음악신탁단체를 중심으로 크리스마스 이브나 당일은 예외로 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어 기대를 모은다. 물론 음악저작권 단체들이 모두 동의해야 가능한 일이다. 캐럴 한 곡에 세밑 거리의 표정이 문득 밝아질 수도 있다는 점을 단체들은 기억해 주시기를.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