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조계사 '지혜의 등불' 가린 철도노조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성탄절인 지난 25일, 세간의 시선을 모은 곳은 서울 견지동에 있는 불교 최대 종파 조계종의 총본사인 조계사였다. 체포영장이 발부된 박태만 철도노조 수석부위원장이 24일 밤 조계사 극락전 2층으로 은신처를 옮겨온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발소리조차 조심스럽던 팔각십층탑 주변은 취재진과 민주노총 관계자 및 파업 지지자, 경찰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신성한 경내에서 소란이 잦아들지 않자 신도들은 민주노총 관계자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공들여 기도드리는 곳인데 왜 여기에 있느냐”며 항의의 목소리를 높였다. 조계사 주변에 모여 있던 파업 지지세력과 반대세력들은 신도들이 항의할 때마다 고성과 욕설을 주고받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수많은 신도들의 새해 염원을 비는 팔각십층탑 앞은 갈등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박 부위원장이 소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성탄절 저녁 취재진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파업 지지세력들은 단체구호를 외치며 경내를 소란스럽게 했다. 급기야 박 부위원장은 “우리도 양해를 구해 머물고 있는 상황이니 소란스럽게 하는 일들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일부 파업 지지자들은 한 보수언론 취재진을 찾아가 각종 욕설을 퍼부으며 경내를 또 한번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노조의 피신을 허락해 곤혹스러워진 조계종은 26일 “조계사는 불교의 대표적 사찰로 신성한 공간”이라며 “종교적 공간을 정치적 장소로 이용해서는 안 되고, 철도노조원들의 만남도 자제했으면 한다”고 요구했다.

‘희망, 행복, 무사고안전 발원.’ 조계사 팔각십층탑 주변에 한 신도가 걸어둔 ‘지혜의 등’에 새겨진 새해 염원의 글이다. 지혜의 등은 내년 1월8일 불교의 4대 명절 중 하나인 성도재일(음력 12월8일,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날)을 기념하는 연등이다.

현재 팔각십층탑 주변에 내걸린 수많은 연등들은 매일 밤 조계사 경내를 환하게 밝히고 있다.

‘지혜의 등’의 불빛이 철도노조의 사상 최장기 파업으로 고조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갈등을 치유해줄 수는 없는지,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김태호 지식사회부 기자 highk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