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처는 1940년대 옥스퍼드대 재학시절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을 읽고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후일 좌파 성향의 보수당 연구부를 방문해 하이에크의 ‘자유의 헌법’을 탁자에 내리치며 “이것이 우리가 믿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 역시 대처에게 자유시장 경제정책을 확신케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런 확신 덕분에 대처는 ‘무엇을 해야 할지’ 확고한 입장을 가질 수 있었다.
정치인으로서 대처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는 히스에게 당권을 도전했다가 정치적 실언으로 중도하차하고 대처에게 바통을 넘긴 키스 조지프가 있다. 그는 하이에크의 ‘자유의 헌법’ 말미에 첨부된 ‘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 제하의 논문을 읽고 자신이 보수의 가치를 지키는 보수주의자가 되지 못했음을 크게 반성했다고 한다. 그는 보수당 안에 정책연구센터를 설립해 소장을 맡았으며 대처는 부소장을 맡았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전파하는 싱크탱크인 경제분석연구소는 보수당 내 정책연구센터 설립에 인적 자원을 제공했다.
대처는 총리가 되면서 자신의 정치력이 약했을 때 보수당 내 히스파 ‘무른 사람들’도 내각에 기용했지만 정치력이 커지자 이념적 확신이 다른 사람들을 갈아치우고 강골파 이념적 동지를 중용, 대처리즘 실천에 나섰다. 후일 대처는 경제분석연구소를 설립한 안톤 피셔와 대표였던 랠프 해리스, 셀던 등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기여를 이렇게 뽐내기도 했다. “그들은 소수였지만 옳았으며 영국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수탉은 크게 울지만 알을 낳는 것은 암탉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