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미래를 믿고 절제하는 사회
갑오원단(甲午元旦)의 감회가 색다르다. 필자의 눈에 비친 한국 사회의 지난 한 갑자는 매년 희망이라고는 그 기미조차 보여주지 않던 절망의 파노라마였다. 어린 시절의 6·25, 보릿고개, 그리고 부정선거 등은 철없던 때의 일이었으니 그냥 접어두자. 고등학생이 되고 바로 4·19를 맞으면서 비로소 떠진 눈에 비친 한국은 한마디로 가망 없는 사회였다. 그 이후의 세월은 마치 누가 연출이라도 한듯 어느 한 해 예외도 없이 매년 깜짝 놀랄 대형사고의 연속이었다.

개발 붐이 끌어들인 유민들을 정부는 오지로 쫓아내고 방치했다. 굶주린 주민들이 견디다 못해 폭동을 일으켰고 그 결과 생긴 신도시가 성남이다. 서울 근교 야산에 세운 서민 아파트가 통째 붕괴해 수많은 주민이 생매장 당했다. 최고급 호텔에서 화재로 수백명이 죽었는데 알고 보니 소방시설이 아예 없었다. 안전 불감증과 무책임은 큰 공사마다 대형사고를 일으켰지만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교통순경들은 공공연하게 트집 잡아 돈을 뜯어갔고 파출소들은 조폭처럼 상가 건물마다 상납금을 걷어갔다. 매년 추한 모습을 반복하는 한국의 미래에 도무지 희망을 걸 수 없었다. 반면에 학교 수업과 문헌은 나름대로 서양의 발달한 문물을 소개했기 때문에 이에 비추어 본 우리 현실은 오히려 더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세월은 이렇게 절망만을 안겨주며 흘러갔는데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는 엄청나게 발전했다. 빈곤문제가 상존하지만 경제개발은 전통적 가난을 퇴치했다. 원자력발전소 납품 부정 사건은 문제를 들춰냈기 때문에 결국 해결될 것이고 그 덕분에 안전 경각심도 많이 개선됐다. 돈 뜯는 교통순경은 없어졌고, 파출소 상납금도 많이 고쳐진 모양이다. 내가 새로운 사태에 절망을 추가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고쳐야 할 비리를 꾸준히 고쳐왔던 것이다.

모든 사회적 변화는 기득권층의 저항을 부르는데, 이 저항의 장벽을 넘지 못하면 변화도 없다. 기득권이 부당하더라도 이것을 박탈하려는 변화는 반드시 거센 저항을 만난다. 그런데 변화의 이익을 나눠 기득권층을 달랜다면 저항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한국 사회의 경우 고도성장의 성과가 있었기에 윈윈 방식의 변화 유도가 가능했다. 예컨대 국민은 세금을 더 납부해 경찰관의 월급을 올려 주고 그 대신 상납금을 면제받은 셈이다.

대부분의 사회경제적 문제는 지금 당장 서로 더 많이 차지하려는 짧은 안목의 탐욕에서 비롯한다. 각자 뒷날의 더 큰 이익을 내다보고 지금 서로 절제하는 사회는 소모적 갈등을 크게 줄인다. 미래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안목이 짧아지는데 궁핍한 개도국일수록 미래가 불안하다. 지난 한 갑자를 점철한 한국 사회의 갈등은 당시 한국인들조차 ‘한강의 기적’을 예견하지 못했기에 벌어진 일들이다.

개발연대 초기 많은 사람들은 정부가 내세운 구호 ‘선성장 후분배’를 당시 기득권층의 자기합리화로 받아들였다. 과연 세월이 흐른 지금, 한국의 재벌 총수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런데 대다수 국민이 누리는 풍요 역시 전례 없이 커졌기 때문에 상대적 점유율로 보면 오늘날 부자들의 몫은 오히려 줄었다. 당시에는 기만적 책략으로 보였지만 지나고 보니 결과적으로 ‘선성장 후분배’가 실현된 것이다.

정치도 그렇다. 당장의 정쟁은 권력 쟁탈전이다. 특히 대통령제에서는 선거에서 지면 끝이므로 윈윈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안목이 짧은 야당은 다음 선거에서는 이겨보려고 정부의 흠집만 찾아 부풀린다. 집권당이 똑같이 맞불작전으로 나서면 정치판은 이전투구로 변하고 신당이 들썩거린다.

한국 정치는 수많은 고비를 거치고 대통령 직선의 87체제로 접어들었다. 민주정치의 경험이 짧은 만큼 우리 정치인들은 앞으로 더 많이 배워야 할 것 같다. 야당은 협조할 건 협조하면서 대안을 제시하고, 여당은 전체적 정책체계와 차질을 빚지 않는 야당의 비판은 가급적 수용해야 국민의 지지를 얻는다는 사실을 배웠으면 좋겠다. 갑오개혁 두 갑자를 맞는 새해 벽두에는 한국 정치의 선진화를 기대해 본다.

이승훈 < 서울대 명예교수·경제학 shoonlee@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