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후 엇박자…카드사태로 소비회복 '찬물'
2013년 수출 성장기여 1.3%P…내수는 0.7%P 그쳐
○한쪽 다리로 버틴 한국 경제
그런데 이 당연한 공식이 한국에선 언제부터인가 통하지 않았다. 경제가 커졌는데 내수는 쪼그라든 것이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 2012년 국내총생산(GDP) 가운데 내수 비중은 75.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82.7%보다 7.3%포인트 낮았다. 이는 2000년 86.5%에서 11.1%포인트 급락한 것이다. OECD 평균 내수비중이 1.0%포인트 내린 것과 비교하면 유례없는 폭락이다. 2007년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를 달성하는 등 한국 경제의 밀레니엄이 겉보기엔 화려했지만, 속으로는 영양실조로 허덕이고 있었던 셈이다.
골골대는 내수 대신 경제 성장을 뒷받침한 것은 수출이었다. 기재부가 산업연관표 분석을 통해 각 부문 성장기여도를 산출해보니, 2012년 GDP 증가율 2.0% 가운데 1.3%포인트가 수출에서 비롯됐고, 내수는 0.7%포인트 기여하는 데 그쳤다. 금융위기 직격탄을 맞은 2009년엔 내수가 성장률을 0.4%포인트 깎아 먹기도 했다. 한국 경제가 수출이라는 외다리로 위태롭게 버텨왔다는 얘기다.
○한국 내수의 수난사
절름발이 경제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의 숙명일까. 그렇지 않다. 수출주도형 경제 성장의 드라이브를 걸었던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내수는 순조롭게 성장했다. 특히 내수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민간 소비의 추이는 GDP와 똑 닮았다. 엇박자가 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때다. 1990~1997년 연평균 GDP 증가율은 7.5%로 민간소비 증가율 7.4%와 거의 같았지만, 1997년 이후 연평균 4.0%, 2.9%로 격차가 벌어졌다. 국민들의 구매력, 다시 말해 소득이 경제성장 속도를 못 쫓아간 것이다.
문제는 일자리였다. 서울 광장시장에서 빈대떡 장사를 하는 추근성 씨가 1999년까지 다니던 건설회사는 매출 200억원의 중견기업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국내 수주가 끊겨버리고 추씨의 회사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1998년 들어선 5개월간 월급을 못 받았다. 사장은 아파트를 팔아서라도 회사를 살리려고 했지만 결국 20여명의 직원들이 모두 길거리로 나앉았다.
정리해고가 잦아지면서 실질임금 증가율은 1997~2011년 연평균 1.5%에 머물렀다. 그 이전(1993~1997년)엔 5.7%에 달했다. 추씨는 “위기 이전엔 배관공이 한 달에 800만~1000만원을 벌어갈 정도였지만 그런 고임금 시대는 다시 오지 않았다”고 떠올렸다. 한 푼이 급했던 그는 카드사에 1년 계약직으로 입사, 채권추심 업무를 시작했다. 차량유지비는커녕 4대 보험 혜택도 받지 못했고, 연 2000만원 수입에 감지덕지했다. 물가상승률이 7.5%(1998년)에 달해 외식은 꿈도 꾸지 못했다.
○세 번의 악재가 남긴 경기 불감증
회복되던 민간 소비에 결정적 타격을 준 것은 2003년 카드사태였다. 소비 촉진을 위한 신용카드 장려정책은 집마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안겼다. 가계저축률이 급락한 탓에 소비가 살아나기 어려웠다. 카드사를 비롯한 금융권이 타격을 받았다. 추씨는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했지만 생계는 마이너스였다. 결혼 직후 생계가 어려워지다 보니 모은 돈도 없었다. 앞날이 불투명한 월급쟁이 생활을 그만두고 빈대떡 집에 뛰어든 이유였다.
세 번의 위기를 거치면서 GDP 가운데 가계소비 비중은 1990년 59.5%에서 2012년 51.1%(OECD 집계)까지 추락했다. 34개 회원국 가운데 27위. 같은 수출 중심 국가인 독일은 1990년 59.8%로 한국과 비슷했지만 여전히 56% 선을 지키고 있다. 일본의 가계소비 비중은 56.7%에서 59.5%로, 미국은 63.4%에서 68%로 오히려 높아졌다. 이준협 연구위원은 “한국의 가계소비 몰락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특수한 상황”이라며 “최근 미국과 일본에서 주가가 급등하는 등 회복조짐이 뚜렷한 것은 가계소비가 건재한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김유미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