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붕괴 25년, 게르만의 비상] 쿠르트 베크 前 사민당 당수 "상대방 인정하는 獨정치문화가 협력 가능케 해"
“앙겔라 메르켈은 굉장히 명석한 총리다.”

독일의 제1야당인 사회민주당(사민당)의 쿠르트 베크 전 당수(현재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총재)는 독일 현지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이같이 말했다. 베크 전 당수는 메르켈 총리의 집권 1기 대연정 파트너로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야권의 거물급 인사다. 인터뷰는 메르켈 총리의 취임식이 있던 지난달 17일 에버트 재단 본사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서 이뤄졌다.

▷집권 여당인 기독민주당(기민당)과의 대연정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었나.


“메르켈 총리가 정치를 잘한다. 대연정이 가능했던 것은 그동안 두 정당이 상호 교류하며 신뢰를 쌓아왔기 때문이다.”

▷정당은 경쟁하는 게 숙명 아닌가.

“각 정당이 민주주의의 원리를 인정하고 선거 결과에 승복하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작년 9월)에서 집권 여당인 기민당·기독사회당(기사당) 연합이 차지한 의석은 49%였다. 제1야당인 사민당은 30%를 확보했다. 메르켈 총리를 지지하지만 반대 세력도 끌어안으라는 게 국민의 명령이었던 셈이다.”

▷연정을 하면 양당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지 않나.

“물론 기민당은 기업을, 사민당은 노동자를 지지 기반으로 삼고 있다. 기업과 노동자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래서 상호 대립보다 공존의 가치를 더 중시한다. 상대를 인정하는 정치 문화가 상생과 협력을 가능케 한 요인이다.”

▷한국에서는 여야의 대립이 도를 넘어 정치실종 상태에 빠졌다는 지적이 있는데 독일은 어떤가.


“사실 정당 간 차이는 그리 큰 게 아니다.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 자본주의 등 기본적 가치에 대해서는 두 정당 모두 수용한다. 다만 기민당은 기업을 위해, 사민당은 노동자를 위해 혜택을 얼마나 더 줄 것이냐 하는 정도만 차이가 있다. 양당의 지지 세력인 노사 양측이 동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시스템도 존재한다. 독일의 모든 대기업에는 감독위원회란 기구가 있다. 경영상의 주요 결정에 대해 노조가 경영진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다.”

▷한국은 여당의 당원 수가 10만명이 안될 정도로 정치가 국민과 괴리돼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독일에서도 정치인이 환영받는 직업은 아니다. 욕도 많이 먹는다. 각 정당에 소속된 당원 수도 △사민당 47만명 △기민당 45만명 △기사당 10만명 △기타 20만명 등으로 100만~120만명 규모다. 총인구 8000만명에 비하면 많지 않다. 다만 연방제 국가로서 각 주 및 도시별 자치가 확립돼 있어 생활 속 정치가 낯설지는 않다.”

▷독일에도 지역주의가 존재하나.

“그렇다. 가령 바이에른주에는 사민당이 발붙일 수 있는 영역이 별로 없다. 반대로 제가 있던 라인란트팔츠주에서는 기민당이 인기가 없다. 그런데도 연방 차원에서 이 같은 지역주의가 상당히 상쇄되는 이유는 정당 투표로 선출되는 비례대표 덕분이다. 연방 하원 의석의 절반이 비례대표 몫이다. 물론 이 같은 선거제도 역시 정당 간 타협의 산물이다.”

▷한국에서 최근 독일의 정치 제도와 문화를 배우자는 논의가 많다.


“에버트 재단은 독일의 제도와 시스템이 한국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전수할 의향이 있다. 한국도 통일에 대비해 독일의 경험과 노하우가 필요할 것이다.”

■ 쿠르트 베크는 누구인가

평범한 전기 노동자 출신으로 주총리, 당수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1972년 23세의 나이로 입당했다. 독일 역사상 최다선 주총리(17년 재임) 기록을 갖고 있다. 2006년 당수직에 올랐다.

베를린=이호기 기자/최용혁 POSRI 책임연구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