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지지않는 등불이었던 가인 선생 뜻 이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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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50주기…詩 읊으며 추념사 한 양승태 대법원장
건국초기 3권분립 제도화 기여…손자 김종인 前경제수석도 참석
건국초기 3권분립 제도화 기여…손자 김종인 前경제수석도 참석
“판사가 내린 판결은 대법원장인 나도 이래라저래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1948년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한 뒤 1957년 퇴임하기까지 사법 독립의 기틀을 다진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1887~1964). “그런 재판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에게 “무죄 판결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절차를 밟아 상소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반박한 가인 선생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이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서민호 의원이 자신을 살해하려던 서창선 대위를 사살한 데 대해 1심 재판부가 정당방위를 이유로 무죄 선고를 내리면서 불거졌던 일이다.
가인 선생의 별세 50주기를 맞아 그의 사법부 독립에 대한 노력과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13일 대법원에서 열렸다. 양승태 대법원장(사진)은 추념식에서 ‘법관은 오직 정의의 변호자가 됨으로써 3000만이 신뢰할 수 있는 사법의 권위를 세우는 데 휴식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가인 선생의 생전 발언을 인용하며 “사법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가인 선생이 바라는 추모의 자세”라고 강조했다.
양 대법원장은 만해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라는 시 한 구절인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를 소개하며 “이 나라 전체를 수호하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었던 가인 선생의 뜻을 사법부는 이어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가인 선생의 손자인 김종인 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은 “나라가 잘되려면 3가지 직종이 본래의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며 “학문하는 사람, 언론, 법관이 각자 역할을 해야 한다. 조부께서도 법관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사셨다”고 말했다.
가인 선생의 좌우명은 ‘계구신독(戒懼愼獨·늘 경계하고 홀로 있을 때도 사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동을 삼간다)’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 유학을 마치고 판사를 지낸 뒤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무료 변호를 펼쳤다. 광복 후에는 법무부 장관과 대법원장을 맡아 사법부 기틀을 세웠다. 건국 초기 3권분립 원칙을 제도화해 법조계에선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김선주 기자 saki@hankyung.com
1948년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한 뒤 1957년 퇴임하기까지 사법 독립의 기틀을 다진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1887~1964). “그런 재판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에게 “무죄 판결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절차를 밟아 상소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반박한 가인 선생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이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서민호 의원이 자신을 살해하려던 서창선 대위를 사살한 데 대해 1심 재판부가 정당방위를 이유로 무죄 선고를 내리면서 불거졌던 일이다.
가인 선생의 별세 50주기를 맞아 그의 사법부 독립에 대한 노력과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13일 대법원에서 열렸다. 양승태 대법원장(사진)은 추념식에서 ‘법관은 오직 정의의 변호자가 됨으로써 3000만이 신뢰할 수 있는 사법의 권위를 세우는 데 휴식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가인 선생의 생전 발언을 인용하며 “사법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가인 선생이 바라는 추모의 자세”라고 강조했다.
양 대법원장은 만해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라는 시 한 구절인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를 소개하며 “이 나라 전체를 수호하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었던 가인 선생의 뜻을 사법부는 이어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가인 선생의 손자인 김종인 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은 “나라가 잘되려면 3가지 직종이 본래의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며 “학문하는 사람, 언론, 법관이 각자 역할을 해야 한다. 조부께서도 법관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사셨다”고 말했다.
가인 선생의 좌우명은 ‘계구신독(戒懼愼獨·늘 경계하고 홀로 있을 때도 사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동을 삼간다)’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 유학을 마치고 판사를 지낸 뒤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무료 변호를 펼쳤다. 광복 후에는 법무부 장관과 대법원장을 맡아 사법부 기틀을 세웠다. 건국 초기 3권분립 원칙을 제도화해 법조계에선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김선주 기자 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