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0회의 당시 각국 정상과 유명한 학자들을 꽤 만났는데 우리와 비슷했어요. 특별히 천재적이라기보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할 뿐이더군요. 선진국임을 내세워 시쳇말로 ‘뻥’을 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뻥이라도 자신감을 갖는 게 필요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제윤 금융위원장은 속된 말로 ‘있어 보이는’ 사람이다. 훤칠한 호남형에다 요직을 두루 거친 ‘정통 경제관료’다. 유창한 언변에 유머감각까지 갖춰 그를 만나면 재미있고 유쾌하다. 국제금융 업무를 오래 맡아 글로벌 감각도 물씬 느껴진다.

하지만 속은 아니다. 겉과 다르다. 그를 조금만 파고 들어가면 소탈하고 검소한 면모가 드러난다. 늘 들고 다니는 검은색 서류가방이 대표적이다. 얼핏 보기에도 군데군데 덧댄 자국이 선명하다. 10여년 전 한 공항에서 구입한 이 가방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한·미 통화스와프,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등 그가 역할을 한 중요한 협상과 회의를 함께 겪은 ‘분신’ 같은 물건이다.

지난해 기자들과의 산행에선 통이 넓은 면바지를 입고 나타나 한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참석한 금융위 간부 중 가장 등산할 것 같지 않은 차림새였다. “위원장님 등산복 하나 마련해 드려야 하는 거 아니냐”는 질타(?)가 비서실에 쇄도했다는 후문이다.

◆‘될성 부른 떡잎’ 아니라고 실망할 필요 없어

‘화려해 보이지만 소탈한’ 신 위원장이 선택한 맛집은 서울 중구 다동의 ‘우리집 순두부’. 직원들과 편하게 만날 때 찾는 집이라고 했다. “어릴 적 어머니가 두부 심부름을 자주 시키셨어요. 프라이팬에 부침을 해 주곤 하셨죠. 제가 대학 1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기억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신 위원장의 조부는 해방 직후 개성시 개풍군을 지역구로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다.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 밑에서 정치를 배웠다. 그의 어머니는 예나 지금이나 풍파가 많은 정치인 집안으로 시집와 평생을 뒤치다꺼리에 시달렸다. 밖으로만 도는 시아버지와 남편을 대신해 집안을 지킨 것이다.

5·16이 터지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장면 내각에서 총리실 비서관을 지낸 부친은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더 이상 직장을 갖지 못했다. 모친의 고생은 지켜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게 고생하셨지만 어머니는 ‘내 손이 바빠야 남의 손이 편하다’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이 말은 어머니의 유지로 남아 오늘의 신제윤을 키운 자양분이 됐다. “힘들어도 회피하지 않고 앞장서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항상 좋은 결과가 나오더군요.”

[한경과 맛있는 만남] 신제윤 금융위원장 "내 손 바빠야 남의 손 편해…이말 믿고 지금껏 달렸죠"
3남 1녀 중 막내인 그는 ‘될성부른 떡잎’이 아니었다. 몸은 약했고, 성격은 활달하지 않았다. 학교 성적도 그저 그랬다. 지난해 국회 청문회 준비차 초등학교에서 뗀 생활기록부에는 ‘노력은 하나 이해력이 부족하다’고 쓰여 있었다.

“달라지기 시작한 건 1차에 떨어져 2차로 들어간 휘문고 1학년 때부터입니다. 가장 역할을 하는 큰형과 고생하는 어머니의 짐을 덜어주려면 내가 더 바빠져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자정을 넘겨 공부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반에서 18등이던 성적이 2학기엔 1등으로 솟구쳤다. 자신감이 생겼고, 성격도 외향적으로 변해갔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항상 맞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예고없이 다가온 ‘반전’의 경험

유년시절 얘기에 분위기가 숙연해질 즈음 우리집순두부의 대표 음식이 나왔다. 큼지막한 뚝배기에 담겨 나오는 얼큰한 순두부탕이다. 굴전과 주꾸미볶음, 제육볶음, 감자 크로켓 등도 같이 상에 올랐다.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학창시절의 반전 경험은 자신감으로 자리 잡았다. 20대 ‘청년 신제윤’의 뒷심도 그렇게 커졌다. 신 위원장은 재수 끝에 서울대 경제학과(77학번)에 입학했다. 대학 내내 시국은 엄혹했다. 휴강의 연속이었다. 4학년이던 1980년 24회 행정고시에 수석 합격한 그는 카투사(주한미군 배속 한국군)로 입대했다.

거기서 또 한 번의 좌절감을 맛봤다. 서울서 가까운 용산 근무를 원했지만 배치된 곳은 제일 먼 부산(캠프 ‘하야리아’)이었다. ‘빽’이 없어 그런가보다 하며 낙담했다. 더 큰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시합격생이라는 점을 눈여겨본 부대 사령관(대령급)이 ‘비서실’로 그를 부른 것이다. 당시 그의 영어실력은 읽고 해석하는 정도였지 듣기는 말 그대로 ‘꽝’이었다.

지시를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알아들은 척 수개월 동안 ‘예스, 서(Yes, Sir)’를 외쳤지만 금방 사령관에게 들켰다. 마음고생이 극심했다. 그때 또 반전이 일어났다. “이상한 일이죠. 6개월쯤 지나니까 막 들리기 시작했어요. 말문도 터졌고요. 퀀텀 점프(quantum jump·대도약)한 거죠. ”

영어가 ‘통(通)’하자 사령관은 부대 내 소수자 차별을 시정하는 일을 맡겼다. 어느 날 미군과 결혼한 여성이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했다. 남편이 미국 본토로 복귀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해 사인을 해 줬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이혼서류였던 것이다. “가만히 보니 ‘아이드 라이크 투’(I’d like to)를 ‘아드락투’로 발음하며 의사소통은 하는데, 읽고 쓸 줄은 모르는 겁니다.”

그는 소위 ‘양공주’들을 모아 영어 강의를 시작했다. 기초영문법 책을 사 나눠주고 문장의 형식부터 차근차근 가르쳤다. 이 공로로 미 육군성의 ‘공로 메달’을 받았다. “국제무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하면 다들 재미있어 하더군요. 그렇게 호감을 쌓은 게 현안을 해결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지요.”

◆‘뻥’일지라도 자신감 갖는 게 중요

국물이 바닥을 드러내자 신 위원장이 한 뚝배기 더 주문했다. 다시 막걸리가 너덧 잔 돌고 화제는 공직생활로 옮겨갔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지만 공직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해외 근무에서 돌아온 1998년 마땅한 자리를 못 찾고 ‘국제금융센터 설립 준비반장’으로 나가 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 “명함에 ‘준비반장’이라고 써 놓으니까 유관 기관 사람들이 공무원인 줄 모르고 대놓고 무시하더군요. 전화를 걸면 ‘어 그래~’ 라는 식의 반말이 돌아오기 일쑤였지요. 관료가 ‘갑(甲)질’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절감한 시간이었습니다.”

가장 보람 있었던 일로는 2010년 G20 서울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를 꼽았다. 당시 몸은 무척 피곤했다. 국제콘퍼런스 콜(전화회의)이 항상 오후 9~12시에 열려 퇴근도 어려웠다. 그 시간대가 미국은 아침, 유럽은 점심으로 유일하게 세계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의장국으로서 느끼는 압박감이 컸다. “다른 국제 회의는 준비된 내용을 읽거나 나중에 코멘트를 받으면 됐지만, G20회의는 의제 선정부터 해결 방안까지 너무 광범위해 막막하더군요.”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는 직전 개최국인 영국 담당자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했다. “그가 ‘유 아 더 보스(You are the boss)’라고 딱 한마디 하더군요. 네가 결정해라. 그런 뜻 아니겠습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후 날밤을 새우면서 보스 역에 충실했다. 결과적으로 G20 정상회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돼 국격을 한 단계 높였다. 신 위원장 개인적으로는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커졌다. “당시 각국 정상과 유명학자들을 꽤 만났는데 우리와 비슷했어요. 특별히 천재적이라기보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할 뿐이더군요. 하지만 선진국임을 내세워 시쳇말로 ‘뻥’을 칠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뻥’이라도 자신감을 갖는 게 필요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년 뒤엔 ‘금융의 삼성전자’ 나올 것

그는 취임 직후부터 우리금융지주 민영화에 ‘직(職)’을 걸겠다고 수차례 말했다. 지금까지는 ‘순풍’을 탔다. 경남·광주은행과 우리투자증권 등 주요 자회사들의 매각이 눈앞이다. 이제 제일 힘든 우리은행 본체를 파는 일이 남았다. 금융권에선 여기까지 한 것만도 상당한 성과라는 평가도 나온다. 신 위원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제나 저는 남들이 못 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공적자금 회수나 금융산업 발전을 위해서도 우리은행 매각을 성사시킬 겁니다.”

신 위원장은 연초 ‘금융전업가’ 육성을 화두로 던졌다. 규제를 풀어 금융업에 주력해 온 곳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면 10년 뒤엔 ‘금융의 삼성전자와 현대차’가 나올 것이란 구상이다.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멀리 봐야 하지 않겠어요.” 세 시간여의 ‘인생 이야기’를 마친 신 위원장이 다동 먹자골목의 좁은 길을 따라 총총히 사라져 갔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신제윤 금융위원장 "내 손 바빠야 남의 손 편해…이말 믿고 지금껏 달렸죠"
신제윤 위원장의 단골집 우리집 순두부 46년된 순두부 전문점…찌개 종류만 9개

[한경과 맛있는 만남] 신제윤 금융위원장 "내 손 바빠야 남의 손 편해…이말 믿고 지금껏 달렸죠"
1968년 고 박일성 할머니가 문을 열었다. 지금은 아들과 손녀사위가 운영하고 있다. 초기에는 점심에 순두부찌개를 팔고 저녁에는 대폿집으로 운영하다가 지금은 볶음요리와 튀김요리 등 이자카야 메뉴가 추가됐다. 직접 만든 순두부가 유명하다. 순두부찌개 종류만 해도 해물, 부대, 만두, 버섯, 들깨, 굴 등 9종류가 있다. 순두부 이외에도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각종 해산물과 무침 샐러드 부침개 등이다. 미리 만들어 놓은 음식 없이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준비해서 내놓는다. 순두부는 7000~7500원이며 대부분 요리가 1만5000~2만5000원이다. 회식손님을 위해 세트 메뉴도 있다. 모둠 회와 간사이오뎅 주꾸미삼겹볶음 문어겨자무침 치킨가라아게 도미뱃살 등이 나오며 4인 기준으로 13만2000원이다. 영업시간은 점심 오전 11시20분~오후 2시20분, 저녁 오후 5시~11시30분이다. 매주 일요일과 설·추석에 쉰다. (02)777-4721 서울 중구 을지로3길22(다동 121의3)

류시훈/박종서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