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부터 해방공간까지…판화 조명
한국 근대 판화사는 정체기 또는 공백기가 아니라 현대 판화 발전의 밑바탕을 다진 중요한 시기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동안 학계에선 조선시대에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같은 대중 계몽서와 왕실의궤도의 삽화, 민간의 벽사용 그림, 지도제작 등의 목적으로 활발히 제작되던 판화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혼란을 겪으며 정체기에 접어든 것으로 파악해 왔다.

중견 판화가 홍선웅 씨는 개화기 이전부터 해방공간까지의 판화 역사를 다룬 책 《한국근대판화사》에서 “한국근대 판화가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성과를 일궈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저자는 근대 판화의 역사를 크게 개화기,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등 세 시기로 구분하고 개화기를 한국판화사의 획기적인 전기를 이룬 시기로 평가했다. 1883년 일본의 주쿠지활판소에서 제작한 수동식 활판인쇄기와 그곳에서 주조한 연활자가 도입돼 그림을 새긴 목판 판목과 연활자를 같은 활판에 앉혀 인쇄한 간행물이 등장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한성순보’에 게재된 ‘지구전도(地球全圖)’처럼 신문 삽화와 각종 도서에 활용돼 대중 계몽에 크게 기여했다.

저자에 따르면 1930년대에는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과 향토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예술지상주의적 순수판화와 불안한 시대상을 반영한 사실주의 판화가 대거 등장했다. 해방 이후에는 각종 문예지와 잡지 발간이 활발해지면서 목판 삽화의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홍씨는 “한국 근대는 결코 판화사의 공백기가 아니라 오히려 현대 판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바탕을 제공했다”며 “이 책이 국내 판화사 연구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미술문화 펴냄. 288쪽. 1만8000원.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