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 & 라이프] 허진규 회장, 개발 착수하면 20년 걸려도 해내고 마는 집념…임직원 사기 북돋우며 부품소재 국산화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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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오피스 - '뚝심의 리더십'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
현장에서 배운다
궁금한 것 생기면 때와 장소 가리지 않고 사무실·연구소 방문
소통하는 리더
대리·과장 등 실무자들과 허심탄회하게 토론
현장에서 배운다
궁금한 것 생기면 때와 장소 가리지 않고 사무실·연구소 방문
소통하는 리더
대리·과장 등 실무자들과 허심탄회하게 토론
일진그룹 법무팀의 김기영 과장(40)은 지난해 7월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옆자리 직원이 남긴 메모지에 ‘오후 3시30분, 회장님 보고 요망’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경력사원으로 입사한 지 1년도 안 됐던 그는 그룹 회장에게 직접 보고할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던 그는 잠시 후 부서 팀장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서야 저간의 사정을 이해했다. “회장님은 종종 프로젝트 실무 담당자로부터 직접 경과보고를 들으신다네. 현장에서 근무하는 직원과 연구진이 각 분야 최고 인재라고 생각하시는 거지.”
현장 전시회 찾는 회장님
일진그룹 창업자인 허진규 회장의 꿈은 원래 학자였다. 서울대 금속공학과 졸업 후 학군장교(ROTC)로 군 복무를 하던 중 사업가 변신을 결심했다. ROTC 1기로 육군본부 병기감실에서 군용차량과 총포, 탄약 등 병기 조달 계획을 짜는 장교로 근무하다 열악한 국내 공업 수준에 안타까움을 느낀 게 계기였다.
“유학은 사치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제 강점기나 6·25전쟁 때는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는 게 애국이었다면 엔지니어는 기술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일류기술과 일류상품을 만드는 게 애국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사명감에서 창업을 결심해서인지 ‘현장’과 ‘소통’을 중시한다. 일진그룹에서는 회장에게 직접 보고하는 이가 계열사 사장단이나 임원진뿐만이 아니다. 회장 집무실 앞에서 과장과 대리급도 흔히 볼 수 있다. 허 회장은 실무자들과도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주고받는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직접 사무실이나 연구소를 찾기도 한다. 불쑥 나타난 회장을 보고 당황한 경험이 있는 임직원이 한둘이 아니다.(→소통 중시하는 허 회장의 모습)
지난해 10월에는 고객 회사 직원이 뜻밖의 장소에서 허 회장을 만나 깜짝 놀랐다. 경기도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제2회 한국산업대전에서였다. 회사를 소개하던 그는 한 무리의 관람객 속에서 조그만 책자를 손에 든 채 자신의 설명에 귀 기울이고 있는 허 회장을 보고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계열사 대표는 “현장에서 보고 듣고 공부하는 걸 즐긴다”며 “엔지니어인 만큼 이해력이 탁월하다”고 전했다.
부품소재 국산화…포기하지 않는 집념
허 회장은 1968년 일진그룹의 모태인 일진전기를 창업했다. 당시 서울 노량진 집 앞마당에 주물가마 하나를 두고 직원 2명으로 시작해 45년 만인 지난해 3조원 규모의 그룹으로 일궜다.
일진그룹의 외형은 그동안 몰라보게 달라졌지만 세월이 흘러도 절대 변치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부품소재 국산화를 위한 노력이다. 배전금구류, 일렉포일, 공업용 합성다이아몬드, 심리스 튜브(이음새 없는 파이프) 등 대부분의 계열사에서 생산하는 제품이 외국에서 수입하던 것들이다. “일진그룹의 성장사는 한국의 부품소재 국산화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배전금구류는 전선 배전 시설의 연결 부위에 쓰이는 부품이다. 일진전기가 국내 최초로 국산화에 성공하기 전까지 전량 수입했다. 애국하겠다며 어렵게 국산화했지만 ‘국산’이라는 꼬리표에 발목이 잡힐 뻔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1978년의 일이다. 고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행사 때 취임식장인 세종문화회관에서 정전사고가 터졌다. 당시는 정전사고가 수시로 일어나던 때였지만 대통령 취임식이라는 큰 행사여서 한국전력이 발칵 뒤집혔다. “국산(일진전기)이 문제였을 것”이라는 분위기가 강했는데, 청와대와 합동 조사한 결과 일본에서 수입한 제품을 잘못 설치한 게 사고 원인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진전기 제품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 것은 물론이다.
일진머티리얼즈가 국내 최초로 개발 및 양산에 성공한 ‘일렉포일’은 허 회장이 ‘전자산업의 논과 밭’이라고 자부하는 소재다. 반도체가 ‘전자산업의 쌀’로 불리는 걸 빗대 표현한 말이다.
전기 신호를 오가게 하는 소재인 일렉포일은 일진머티리얼즈가 1988년 국산화하기 전까지 전량 일본에서 수입했다. 이 소재를 불량 없이 안정적으로 양산하는 데 걸린 기간이 무려 20여년이다. “우리가 반드시 개발해야 하는 기술은 될 때까지 연구하고 노력한다”는 뚝심 경영의 결실이다.
심리스 튜브도 일진제강이 국내에서 처음 양산에 성공했다. 대일 무역역조 순위 10위권대 제품으로 연간 50만t 규모를 전량 일본과 유럽 등에서 수입하던 것을 2013년부터 국내에서 만들기 시작했다. 2004년 처음 사업성 검토를 시작해 약 3000억원을 투자한 끝에 본격 양산하기까지 10여년이 걸렸다. 지난해 미국에 2000t 규모를 수출하는 등 역수출까지 하고 있다.
열심히 일한 직원은 반드시 보상한다
일진그룹의 터치스크린(TSP) 전문 계열사 일진디스플레이를 이끄는 심임수 대표는 지난해 말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부회장직을 다시 만든 것이다. 기존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임직원의 사기를 올릴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면 과감하게 도입하는 게 허 회장의 경영 스타일이다.
일진디스플레이는 2008년 99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이 2012년 5965억원으로 60배 넘게 급증했다. 그 공로를 인정해 심 대표를 부회장으로 승진시킨 것이다. 허 회장은 “성과가 있으면 확실하게 보상해야 한다”는 자신의 경영철학을 스스로 실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희원 일진제강 대표가 사원으로 출발해 사장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중견그룹이면서도 경쟁력 있는 연구개발자들이 자리를 지키며 소재부품 국산화에 주력하는 것도 ‘노력하면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직원들이 똘똘 뭉쳐 뭔가를 개발하겠다는 욕구를 계속 갖도록 하는 게 허 회장의 경영 노하우인 셈이다.
김병근 기자 bk11@hankyung.com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던 그는 잠시 후 부서 팀장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서야 저간의 사정을 이해했다. “회장님은 종종 프로젝트 실무 담당자로부터 직접 경과보고를 들으신다네. 현장에서 근무하는 직원과 연구진이 각 분야 최고 인재라고 생각하시는 거지.”
현장 전시회 찾는 회장님
일진그룹 창업자인 허진규 회장의 꿈은 원래 학자였다. 서울대 금속공학과 졸업 후 학군장교(ROTC)로 군 복무를 하던 중 사업가 변신을 결심했다. ROTC 1기로 육군본부 병기감실에서 군용차량과 총포, 탄약 등 병기 조달 계획을 짜는 장교로 근무하다 열악한 국내 공업 수준에 안타까움을 느낀 게 계기였다.
“유학은 사치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제 강점기나 6·25전쟁 때는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는 게 애국이었다면 엔지니어는 기술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일류기술과 일류상품을 만드는 게 애국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사명감에서 창업을 결심해서인지 ‘현장’과 ‘소통’을 중시한다. 일진그룹에서는 회장에게 직접 보고하는 이가 계열사 사장단이나 임원진뿐만이 아니다. 회장 집무실 앞에서 과장과 대리급도 흔히 볼 수 있다. 허 회장은 실무자들과도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주고받는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직접 사무실이나 연구소를 찾기도 한다. 불쑥 나타난 회장을 보고 당황한 경험이 있는 임직원이 한둘이 아니다.(→소통 중시하는 허 회장의 모습)
지난해 10월에는 고객 회사 직원이 뜻밖의 장소에서 허 회장을 만나 깜짝 놀랐다. 경기도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제2회 한국산업대전에서였다. 회사를 소개하던 그는 한 무리의 관람객 속에서 조그만 책자를 손에 든 채 자신의 설명에 귀 기울이고 있는 허 회장을 보고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계열사 대표는 “현장에서 보고 듣고 공부하는 걸 즐긴다”며 “엔지니어인 만큼 이해력이 탁월하다”고 전했다.
부품소재 국산화…포기하지 않는 집념
허 회장은 1968년 일진그룹의 모태인 일진전기를 창업했다. 당시 서울 노량진 집 앞마당에 주물가마 하나를 두고 직원 2명으로 시작해 45년 만인 지난해 3조원 규모의 그룹으로 일궜다.
일진그룹의 외형은 그동안 몰라보게 달라졌지만 세월이 흘러도 절대 변치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부품소재 국산화를 위한 노력이다. 배전금구류, 일렉포일, 공업용 합성다이아몬드, 심리스 튜브(이음새 없는 파이프) 등 대부분의 계열사에서 생산하는 제품이 외국에서 수입하던 것들이다. “일진그룹의 성장사는 한국의 부품소재 국산화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배전금구류는 전선 배전 시설의 연결 부위에 쓰이는 부품이다. 일진전기가 국내 최초로 국산화에 성공하기 전까지 전량 수입했다. 애국하겠다며 어렵게 국산화했지만 ‘국산’이라는 꼬리표에 발목이 잡힐 뻔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1978년의 일이다. 고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행사 때 취임식장인 세종문화회관에서 정전사고가 터졌다. 당시는 정전사고가 수시로 일어나던 때였지만 대통령 취임식이라는 큰 행사여서 한국전력이 발칵 뒤집혔다. “국산(일진전기)이 문제였을 것”이라는 분위기가 강했는데, 청와대와 합동 조사한 결과 일본에서 수입한 제품을 잘못 설치한 게 사고 원인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진전기 제품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 것은 물론이다.
일진머티리얼즈가 국내 최초로 개발 및 양산에 성공한 ‘일렉포일’은 허 회장이 ‘전자산업의 논과 밭’이라고 자부하는 소재다. 반도체가 ‘전자산업의 쌀’로 불리는 걸 빗대 표현한 말이다.
전기 신호를 오가게 하는 소재인 일렉포일은 일진머티리얼즈가 1988년 국산화하기 전까지 전량 일본에서 수입했다. 이 소재를 불량 없이 안정적으로 양산하는 데 걸린 기간이 무려 20여년이다. “우리가 반드시 개발해야 하는 기술은 될 때까지 연구하고 노력한다”는 뚝심 경영의 결실이다.
심리스 튜브도 일진제강이 국내에서 처음 양산에 성공했다. 대일 무역역조 순위 10위권대 제품으로 연간 50만t 규모를 전량 일본과 유럽 등에서 수입하던 것을 2013년부터 국내에서 만들기 시작했다. 2004년 처음 사업성 검토를 시작해 약 3000억원을 투자한 끝에 본격 양산하기까지 10여년이 걸렸다. 지난해 미국에 2000t 규모를 수출하는 등 역수출까지 하고 있다.
열심히 일한 직원은 반드시 보상한다
일진그룹의 터치스크린(TSP) 전문 계열사 일진디스플레이를 이끄는 심임수 대표는 지난해 말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부회장직을 다시 만든 것이다. 기존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임직원의 사기를 올릴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면 과감하게 도입하는 게 허 회장의 경영 스타일이다.
일진디스플레이는 2008년 99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이 2012년 5965억원으로 60배 넘게 급증했다. 그 공로를 인정해 심 대표를 부회장으로 승진시킨 것이다. 허 회장은 “성과가 있으면 확실하게 보상해야 한다”는 자신의 경영철학을 스스로 실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희원 일진제강 대표가 사원으로 출발해 사장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중견그룹이면서도 경쟁력 있는 연구개발자들이 자리를 지키며 소재부품 국산화에 주력하는 것도 ‘노력하면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직원들이 똘똘 뭉쳐 뭔가를 개발하겠다는 욕구를 계속 갖도록 하는 게 허 회장의 경영 노하우인 셈이다.
김병근 기자 bk1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