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손병옥 푸르덴셜생명 사장 "하루하루 꽉 채워 살았더니 CEO 되더군요"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경력 단절' 딛고 일어선 건 철저한 준비와 치열함 덕분
일에 절실함 더 가진다면 여성 '유리 천장' 사라질 것
일에 절실함 더 가진다면 여성 '유리 천장' 사라질 것
“창의적 순발력 지력도 물론 봐야겠지만 열정이 있으면 못할 일이 없지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스스로 못 견디는 인재를 높이 칩니다. 스스로 ‘리에너자이즈’할 수 있는 사람이지요. 화려해 보이지 않아도 무던히 매 순간에 충실한 사람이 결국 이긴다고 믿습니다.”
“남들은 저보고 그럽니다. 왜 그리 독하게 사느냐고요. 하지만 조금만 편하게 살았어도 지금의 절반도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하루하루를 꽉 채워서 살자’가 제가 지켜온 소신입니다.”
손병옥 푸르덴셜생명 사장 하면 어김없이 ‘국내 최초의 여성 금융사 사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외양도 영락없다. 구김 없는 깔끔한 정장에 잔머리 한 올 빠져나오지 않은 머리 모양이 그렇다.
하지만 ‘성공한 여성 CEO’라는 프레임만으로 그를 평가하는 건 절반만 보는 것이다.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허투루 시간을 보내는 법이 없는 그를 주변에선 ‘120년을 살 사람’이라고 부른다. 평균 수명만큼만 살아도 남들보다 두 배 가까운 시간을 산다는 의미의 농이다. 십수년 단골 샤부샤부집인 서울 서초동 ‘진상’에서 풀어낸 그의 얘기에서 섬세하고 신중한 인상 뒤에 감춘 열정의 맥박이 전해졌다.
○공부는 ‘시골 소녀’의 자존심
손 사장은 말 그대로 ‘똑 부러지는 소녀’였다. 부산 출생인 손 사장은 한전을 다니던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2학년 때 대구로 이사했다. 대구에서 공부깨나 하는 학생들만 모인다는 경북대 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때부터는 손 사장 세상이었다. 3년 내리 전교 1등을 했다.
하지만 서울의 경기여고로 진학한 뒤 시련이 시작됐다. “일단 경기여중을 나오지 않은 탓에 텃세가 심했습니다. 성적도 그저 그런 수준으로 떨어지더군요.” 졸지에 존재감 없는 ‘시골 소녀’가 된 것이다.
“대구가 서울보다 나은 점이 많은데도 시골 출신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그렇게 싫더군요. 제 사투리를 놀리려고 부모님께 전화 걸 때 공중전화까지 뒤따라오는 짓궂은 친구들도 있었지요.”
그가 찾은 해법은 공부였다. 죽기 살기로 매달리자 하루가 다르게 성적이 솟구쳐 우등생이 됐다. 반 친구들은 그제야 그를 인정했다. “잠시만 방심하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걸 어린 나이지만 그때 깨달았던 것 같아요.” 주어진 일은 무조건 열심히 하는 습성이 자리잡게 된 계기였다.
여성으로서 자존감은 어머니에게서 배웠다. “결혼해서 공무원인 남편(고 이석영 전 중소기업청장)의 미국 유학길에 따라 나서게 됐어요. 큰애를 낳은 지 겨우 몇 달 지났을 때라 막막하더군요. 그때 엄마가 선진국에서 마음껏 배워야 하니 아기를 두고 가라고 하시더군요. 당신께서 봐 주신다고요.” 그 무렵엔 ‘여자는 너무 똑똑하면 시집 못 가’, ‘여자가 직장생활 오래하면 안 좋아’라는 사고가 지배적이었다. 여자도 배움을 통해 자립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열린 교육은 육아와 일을 병행해야 하는 직장생활의 고비마다 큰 힘이 됐다.
○“매사 치열하게 삶을 들볶았다”
보수적인 부친의 뜻에 따라 손 사장은 여대(이화여대 영문과)로 진학했다. 졸업 무렵 높은 경쟁률을 뚫고 일본항공(JAL)에 합격했다. 하지만 ‘바람 드는 직업’이라며 반대하는 아버지를 이기지 못해 다시 선택한 체이스맨해튼 서울지점이 첫 직장이 됐다. 우연찮게 금융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순순히 아버지의 뜻을 따른 건 존경심에서였다고 했다. 학창시절 손 사장은 늦은 밤까지 공부하다 졸리면 머리맡에 ‘몇시에 깨워 달라’는 쪽지를 남기고 잤다. 그러면 어김없이 아버지가 그를 깨웠다. 신뢰였다. 일에 대한 자세도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일본 와세다대 상대를 나온 엘리트였던 그의 부친은 한때 회사에서 제지공장 운영을 맡았다.
“주말에 집에서 쉬시면서도 늘 공장 쪽을 보고 있어 왜 그러나 했는데 곧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어느 날 공장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가 돌아오시더군요.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의 색깔을 주시하다 이상 징후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배운 준비성은 고비마다 그를 구했다. 유학시절 남편이 공부하니 손 사장이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학생비자(F2)라 취업이 어려웠다. 유일한 방법은 이민국의 승인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민국 인터뷰를 신청했다. 당시 미국 이민국은 위압적인 자세로 외국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영문과를 나왔다지만 이들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밤새 질문과 대답을 만들어 외워갔다. 그러고는 “미국은 휴머니즘의 국가인데 남편의 유학을 위해 취업하려는 나를 왜 이해 못하느냐”고 당당하게 말했다. 바로 취업 승인이 떨어졌다. 그렇게 대학교 안에 있는 브루클린세이빙스은행에 취직해 금융 경력을 이어갔다.
손 사장은 요즘 말하는 경력 단절 여성이다. 남편이 상무관으로 또 한번 미국에 나가면서 그는 모든 이력서를 찢어버렸다. 다시 일할 것이란 기대를 접은 것이다. 3년 뒤 한국에 돌아왔을 땐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뭔가에 새로 도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쪼그라져 있었다.
하지만 치열했던 삶의 자세가 기회를 줬다. 첫 직장이었던 체이스맨해튼 시절 상사가 한국푸르덴셜생명 사장이 돼 그를 부른 것이다. 인사부장을 맡아 악착같이 일했다. 그렇게 경력을 재개한 지 7개월 만인 그해 말 사장은 그에게 “경력이 부족한 여성에게 인사부장을 시키는 데에 반대가 많았는데, 내 판단이 옳았다는 걸 보여줘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렇게 18년을 푸르덴셜생명에서 근무하며 그는 보험업계 최초 여성 부사장, 금융업계 최초 여성 사장에 올랐다.
○스스로 리에너자이즈 할 수 있어야
송송 썬 김치와 면이 굵은 국수를 넣자 걸쭉해진 육수가 더 먹음직해졌다. 한 모금 입맛을 다시던 손 사장은 올해 세운 목표 중 하나가 빨리 퇴근하기라고 말했다. ‘가장 어려울 때가 언제였느냐’는 질문에 “매사에 어렵지 않을 때가 있나요”라고 답할 정도로 치열한 손 사장에게는 난망한 목표처럼 들렸다. 글로벌 보험사다 보니 밤 11시까지 콘퍼런스콜을 하다 퇴근하는 일도 잦다. “사실 목표 달성이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작년과 재작년 목표도 비슷했으니까요. 그래도 먹고살려면 어쩌겠어요. 호호호.”
신입사원을 뽑을 때도 열정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 “창의력 순발력 지력도 물론 봐야겠지만 열정이 있으면 못할 일이 없지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스스로 못 견디는 인재를 높이 칩니다. 스스로 ‘리에너자이즈’ 할 수 있는 사람이지요.”
흔들리지 않는 꾸준함도 강조했다. “안타까운 건 재능 있는 후배들이 성공과 실패에 너무 잘 휘둘리는 겁니다. 일시적인 작은 성공이나 실패에 휘둘리면 길게 가지 못합니다. 화려해 보이지 않아도 무던히 매 순간에 충실한 사람이 결국 이긴다고 믿습니다.”
그가 진지하게 사회생활을 그만두려고 한 적은 딱 한 번 있었다. 2002년 남편이 암 투병을 시작하면서다. 남편이 손 사장을 다잡았다. “당신이 자랑스럽다. 일을 그만두는 게 내게는 더 부담이다. 당신처럼 되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많다. 당신을 꿈꾸는 그들을 위해서라도 일을 계속해야 한다.”
그는 더 치열하게 일했다. “모든 걸 쏟아 일하고 퇴근해서는 남편에게 또 모든 걸 쏟았죠. 몸은 힘들었지만 생각해보니 그때가 제 인생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하루하루가 소중하다는 걸 절감했다는 얘기다. 남편은 5년여 투병 끝에 2007년 세상을 떠났다.
○“일은 고민 대상 아닌 상수(常數)”
손 사장은 직장 여성 1세대다. 또래 중 현역에 남아있는 여성은 거의 없다. 여대생 등 세상 절반의 롤모델이 된 것이다. 비결이 궁금했다. 다소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일을 관둘지 말지부터 고민하는 여성들이 사실 많습니다. 그 생각부터 바꿔야 합니다.” ‘유리 천장’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스스로 본인의 한계를 정하는 게 더 큰 유리 천장이라는 지적이다.
“남자들은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풀지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성은 ‘일을 그만 둘까’라며 도망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절실함이 부족한 거지요. 일은 고민의 대상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서 여성이기 때문에 원칙과 균형을 유지하는 게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자녀의 입학이나 대학입시 같은 인생의 어느 대목에선 가정이 더 중요해질 때가 있는데 그때 잘 대처해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에서도 이제 여성들의 그 정도 사정은 인정해줄 만큼의 기업문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푸르덴셜생명은 특히 그렇고요.”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변함없이 사회공헌이다. 조금 일찍 귀가할 때는 새로운 사회공헌 활동을 구상하고 실천하는 게 취미처럼 됐다. 그는 난치병 어린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메이크 어 위시’ 한국 재단을 설립해 12년째 이끌고 있다. “미국 생활에서 얻은 교훈입니다. 다양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사회공헌·자원봉사 정신이 미국 사회를 이끌어 나가고 있더라고요. 보이지 않지만 그들의 저력이었습니다.”
■ 손병옥 사장의 단골집 진상…참깨소스에 찍어먹는 한우 샤부샤부
팔팔 끓는 육수에 아주 얇게 썬 한우를 살짝 익혀 소스를 찍어 먹는 샤부샤부 전문점. 1987년에 문을 열었다. 한우 샤부샤부가 대표 메뉴다. 사장이 거의 매일 가락동·마장동 축산물 시장에 들러 질 좋은 한우를 고른다. 한우 샤부샤부에는 배추, 느타리버섯, 파, 숙주, 팽이버섯, 새송이버섯, 쑥갓, 떡, 만두, 곤약이 나온다. 한우를 찍어 먹는 참깨소스가 별미다. 제조 방법은 사장만 안다. 샤부샤부를 먹고 나서 4000원을 추가하면 육수에 김치 칼국수를 만들어 준다. 가격대가 상대적으로 낮은 샤부 상추쌈도 인기가 많다. 쌈밥이 만들어져 나오면 한우를 익힌 뒤 된장소스와 함께 먹으면 된다. 후식으로 나오는 양갱은 직접 주방장이 만든다. 한우 샤부샤부는 한우 등급에 따라 1인분에 4만2800~5만7200원. 샤부 상추쌈은 1인분에 1만8700원이다. 쉬는 날이 없으며 영업 시간은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10시30분까지다. 점심·저녁 시간은 예약하는 것이 좋다. (02)581-0092~3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