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도가 AI 방역 차원에서 귀성객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제작한 홍보 전단지. 경남도 제공
경남도가 AI 방역 차원에서 귀성객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제작한 홍보 전단지. 경남도 제공
“설이 대순가요. 자식같이 키워온 오리를 지키는 게 먼저죠.”

29일 전남 해남군 현산면 고현리에서 만난 오리사육 농민 황순철 씨(57)는 “조류인플루엔자(AI) 확산이 걱정돼 서울에 사는 아들들에게 이번 설에는 고향에 오지 말라고 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황씨는 “하루 내내 오리 3만7000여마리가 있는 축사를 방역하고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는 데 매달리고 있다”며 “차례나 성묘는 꿈도 못 꾸는 형편”이라고 덧붙였다.

전국 확산 우려가 커지고 있는 AI가 올해 설 풍속도를 바꿔 놓았다. 농가의 부모들은 감염 확산을 우려해 자녀들의 귀향을 막고 있고, 지방자치단체들은 앞다퉈 각종 설 행사를 자제해 줄 것을 주문했다.

○‘환영’ 플래카드 대신 ‘출입통제’ 안내판

이번 설 바뀐 풍속도는 오리·닭을 키우는 농가 마을의 도로변 곳곳에서 나타났다.

AI가 확진된 해남군 송지면 마봉리로 향하는 주요 도로변에는 ‘고향방문을 환영한다’는 플래카드 대신 ‘출입통제’ 안내판과 방역·통제초소가 곳곳에 세워졌다. 가창오리떼의 군무를 보러 많은 귀성객이 찾던 황산면 고천암간척지 입구에도 ‘접근 금지’ 팻말이 세워졌다.

충남 부여에서 양계농장을 하는 정수종 씨(51)는 “AI 탓에 이웃들도 농장 근처엔 얼씬하지 않는다”며 “자주 방역하는 데다 양계장에 이상 징후가 보이면 신고해야 하기 때문에 이번 설에는 영락없는 옥살이를 하게 됐다”고 푸념했다.

○지자체는 설 행사 자제 주문

충남도는 귀향객들이 축산농가 방문을 자제해 줄 것과 윷놀이 등 마을행사나 모임을 가능한 한 열지 말아 달라는 내용의 긴급공문을 도내 15개 시·군에 발송했다.

경남도는 설을 앞두고 농촌지역을 찾는 귀성객들에게 AI 방역 차원에서 ‘이번 설은 까치도 멀리서 봅시다’란 제목의 홍보전단 3000여장을 배포할 계획이다. 해남군 오리협회 윤재홍 회장(52·옥천면 성산리)은 “주민들도 접촉을 꺼리면서 마을별로 열던 합동 세배와 윷놀이 등의 행사가 취소됐다”고 전했다.

상황이 이렇자 지자체에는 “명절 때 고향에 내려가도 괜찮으냐”는 문의 전화가 쇄도하고 있다. 해남군 종합상황실 정금순 씨는 “AI 진행상황 등을 묻는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며 “가능하면 방문 일정을 연기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국 확산 현실화하나

이날 경남 밀양의 토종닭 농장에서도 AI 의심신고가 접수됐다. 고병원성으로 확진되면 전남·북, 충남·북, 경기에 이어 경남까지 전국 확산이 현실화되는 셈이다. 주이석 농림축산검역본부 동물질병관리부장은 “강원에도 (충남 천안의) AI 발생 씨오리농가에서 새끼오리를 분양받은 농가가 있어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경기도는 AI로 의심 신고된 화성농장의 닭 1만8000여마리를 예방적 살처분했다. 수도권 농장에 내려진 첫 살처분 조치로 경기지역이 국내 최대 닭 산지인 점이 감안됐다.

AI가 확산되는 시기인 발생 2주차에 설 연휴를 맞아 AI가 일파만파로 퍼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과거 겨울에 발생했던 세 차례 AI는 첫 발생 두 달 뒤 잠잠해질 즈음 설이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권재한 농림축산식품부 축산정책국장은 “과거 사례에 비춰 2주차에 신고가 몰리면서 AI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며 “전 국민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토교통부는 AI 발생 지역과 철새도래지 인근 고속도로 나들목을 중심으로 방역시설을 설치했고, 코레일도 전국 106개 역에 방역용 발판을 설치하는 등 확산 방지에 총력을 기울였다.

광주=최성국/대전=임호범/창원=강종효 세종=고은이 기자 skch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