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경조사 직접 못챙길땐 아내 대신보내 마음 전달
설득의 힘은 전문성으로부터
직원들 석·박사 지원 10년째…자신도 일주일 2번 영어공부
이 회장은 도레이 본사 경영진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중국 시장을 겨냥한다면 한국이 최적의 장소입니다. 조만간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면 효과는 극대화될 것입니다. 한국의 전자와 자동차 산업은 세계 최고 수준이고 수준 높은 인력도 풍부합니다.”
차세대 공업용 플라스틱으로 떠오르고 있는 PPS(폴리페닐렌술파이드) 공장의 입지를 놓고 1년 넘게 고민하던 도레이 경영진은 결국 이 회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새만금산업단지를 낙점했다. 새만금단지가 조성된 이후 외국 기업으로는 가장 큰 규모인 3000억원의 투자가 결정된 순간이었다.
“실력이 있어야 설득한다”
도레이는 2018년까지 새만금에 PPS 화합물과 원료를 동시에 생산하는 일관설비를 완공할 계획이다. 도레이가 첨단 소재인 PPS 공장을 일본 밖에 짓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회장은 지난해 도레이 본사를 찾을 때마다 “PPS 공장은 한국에 지어야 한다”고 주요 임원들을 끈질기게 설득하며 ‘로비전’을 펼쳤다. 그는 “동남아 국가 서너 곳이 공장 유치를 위해 부지 무상 제공과 세금 면제 등 파격적인 혜택을 주겠다고 약속해 본사 경영진이 막판까지 고심했다”며 “한국의 수준 높은 인적자원과 탄탄한 인프라, 중국과의 인접성 등 장점을 집중적으로 부각한 것이 주효했다”고 전했다.
도레이는 지난해 4월엔 2022년까지 한국에 1조6000억원을 투자해 탄소섬유와 정보기술(IT) 소재 공장을 증설하겠다는 장기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이 회장은 “도레이 본사가 한국을 믿고 미래를 밝게 보고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매물로 나온 웅진케미칼을 인수한 것도 집요한 이 회장의 본사 설득 과정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이 회장은 “웅진케미칼 인수를 처음 타진했을 때만 해도 본사에선 ‘공장이 오래됐다’ ‘기술 투자가 뒤처져 실익이 없다’는 등 반대 목소리가 많았다”고 뒷얘기를 들려줬다.
그는 “웅진케미칼과 도레이첨단소재는 한 뿌리에서 출발해 동질감이 강하고 수처리 사업에서 시너지 효과가 가능하다는 것과 우수한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 등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했다”며 “도레이첨단소재의 목표인 2020년 매출 5조원, 영업이익 5000억원 달성에 웅진케미칼이 꼭 필요하다는 주장을 본사가 결국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40년 베테랑의 든든한 리더십
도레이가 한국 비즈니스를 확장하는 데는 한국 사업을 총괄하는 이 회장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그의 사업 통찰력을 높이 사고 있는 것이다.
1973년 제일합섬에 입사한 그는 올해로 16년째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1972년 출범한 제일합섬은 삼성에서 분리돼 (주)새한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99년 필름, 원사 등의 사업을 떼내 도레이와 합작으로 도레이새한을 세웠다.
이후 (주)새한은 2008년 웅진케미칼로, 도레이새한은 2010년 도레이첨단소재로 각각 개명했다. 그러다 도레이첨단소재가 웅진케미칼을 인수함으로써 두 회사는 다시 한 몸이 됐다. 웅진케미칼의 주요 임직원들은 40년 넘게 회사를 지키고 있는 이 회장의 후배들이어서 조직 융화에도 문제가 없다는 평가다. 폴리에스테르 필름을 만드는 도레이첨단소재의 구미 2공장은 웅진케미칼 공장과 출입구는 물론 직원식당도 함께 쓸 정도로 심리적으로도 거리감이 없다.
이 회장의 리더십은 끊임없는 자기계발과 직원들과의 소통에서 나온다. 현장에서 체득한 지식과 동료들과의 스킨십도 중요하다. 화학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 출신인 그는 구미공장에서 26년 동안 일하면서 대부분의 생산부서를 거쳤다. 기업가로서의 강한 리더십은 사업 파트너를 설득하는 데 가장 큰 무기다. 설득력의 힘은 전문성으로 보강된다. 그는 “세계 수준의 경쟁자들과 견줘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전문성을 갖춰야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회장의 설득론)
이 회장은 “화학산업은 생산라인이 잠시라도 멈추면 원료가 굳어버리기 때문에 치명적인 피해가 발생한다”며 “장치산업은 앞뒤 공정 간에 흐름이 중요하다”고 직원들에게 강조한다. 이 회장은 지금도 서면으로 보고를 받기보다는 담당자를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글로벌 5대 소재기업의 꿈
이 회장은 회식 때 모든 직원들에게 발언할 기회를 준다. 처음엔 CEO 앞에서 어색해하던 사원들도 이제는 거리낌없이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다. 정치인 못지않을 정도로 악수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말 그대로 ‘스킨십’을 하는 것이 말로만 인사하는 것보다 효과가 크다는 생각에서다.
직원들의 경조사를 챙기는 것은 모든 CEO들의 일상이지만 이 회장은 자신만의 방식이 있다. 부득이하게 직접 문상하지 못할 때는 아내를 대신 보내는 것이다. 일본 출장 중이던 지난달 27일에도 인력개발팀 직원이 부친상을 당했다는 소식에 이 회장의 부인이 경기 일산에 있는 장례식장을 찾았다. CEO가 진심으로 직원들을 챙긴다는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자기계발의 중요성은 스스로 실천하면서 보여준다. 2003년 고려대에서 국제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지난해 홍익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일본어는 신입사원 시절부터 일본 기술서적을 읽으며 독학했고, 재작년부터는 원어민 강사를 1주일에 두 번씩 만나 영어 공부도 하고 있다. 직원들을 위한 대학원 석·박사 지원제도도 올해로 10년째 운영 중이다.
이 회장은 1999년 CEO 취임 이후 신성장동력을 꾸준히 발굴했다. 2002년 LCD(액정표시장치)용 필름 등 IT소재 사업에 뛰어든 것을 시작으로 2006년과 2010년엔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 부직포 사업을 차례로 시작했다. 2012년엔 탄소섬유를, 지난해엔 PPS 사업을 각각 새 먹거리로 추진했다. 도레이첨단소재는 올해를 글로벌 5대 소재기업으로의 도약을 준비하는 원년으로 삼았다.
이 회장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회사를 어떻게 다시 변화시킬지 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박해영 기자 bon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