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견제 안받고, 의원은 건수 챙기고…'설익은 입법' 쏟아내
# 1. 지난해 7월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환경오염 피해 구제에 관한 법안’은 특정 기업의 시설로 인해 환경오염 피해가 발생했다는 개연성이 입증되면 해당 기업에 배상 책임을 물리도록 하는 법안이다. 명확한 인과관계 없이 개연성만으로 기업에 책임을 물리도록 해 논란이 됐다. 이 법안은 환경부가 이른바 ‘청부 입법’ 형태로 이 의원을 통해 발의한 것으로, 산업통상자원부 등 다른 부처와 협의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이 법안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 2. 조해진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해 5월 대표 발의한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안’도 청부 입법 사례다. 미래창조과학부가 조 의원을 통해 발의한 이 법안에는 이동통신사의 보조금뿐만 아니라 삼성전자 등 휴대폰 제조사가 판매점 등에 제공하는 보조금(판매장려금)까지 규제하는 내용이 들어갔다. 지금까지 보조금 규제는 이동통신사들이 주는 부분만 최대 27만원으로 정해져 있었을 뿐, 휴대폰 제조사들의 보조금은 규제를 받지 않았다. 국내 휴대폰 제조사들은 이 법안이 통과되면 정부에 제출한 휴대폰 장려금 규모 등 영업비밀 자료가 외부에 공개돼 해외사업에 차질을 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정부는 견제 안받고, 의원은 건수 챙기고…'설익은 입법' 쏟아내
정부 부처가 여당 국회의원을 통해 법안을 발의하는 청부 입법은 신속하게 정책을 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부동산 활성화 대책 등 법 개정이 미뤄질수록 효과가 반감되는 정책에 대해서는 청부 입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청부 입법은 법안 발의가 정부 입법에 비해 까다롭지 않기 때문에 규제를 양산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정부 부처들이 다른 부처와 협의 없이 경쟁적으로 의원을 통해 법안을 발의하다 보니 ‘중복 규제’도 발생한다.

정부 입법의 경우 관계부처 협의를 거치고 규제개혁위원회에서 심사도 받아야 한다.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기까지 총 10단계를 거친다. 반면 의원 입법은 이보다 훨씬 적은 3단계만 거치면 된다. 부처 입장에서는 다른 부처와 주도권 다툼을 벌여야 하고 규제 심사까지 받는 정부 입법보다 청부 입법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법안 발의 건수를 늘릴 수 있기 때문에 정부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시민단체들이 연말에 수여하는 우수 국회의원상은 법안 발의 건수가 기준인 경우가 많다. 법안 발의문에는 정부의 청탁을 받아 법안을 발의했다는 내용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해당 법안이 청부 입법인지 여부를 가려내기는 쉽지 않다.

부처들이 청부 입법을 남발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과 기업에 돌아간다는 지적이 많다. 한 휴대폰 제조사 관계자는 단말기 유통구조 개선법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공정거래법에 따라 가격 및 조건 차별을 규제하고 있는데 미래부가 또 다른 규제를 만들고 있다”며 “기업 입장에서는 이중 규제를 겪는 셈”이라고 했다.

청부 입법이 대부분 정권 초기에 쏟아져 나오는 것도 기업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다. 부처와 여당 의원들이 경쟁적으로 새 정권의 입맛에 맞는 규제를 내놓다 보니 기업들이 대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2012년 상반기부터 지난해 초까지 대형마트 영업시간 규제 등 경제민주화 법안이 국회에서 무더기로 통과된 게 대표적이다.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지낸 이한구 의원은 “대부분의 청부 입법은 각 부처가 경쟁적으로 다른 부처와 협의도 없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며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청부 입법을 허용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국무조정실이 의원 입법 때 사후 규제 영향 분석을 실시하기로 한 것에 대해 “의원이 법안을 낼 때부터 규제 사전검토서를 첨부해야 다른 의원들이 상임위원회나 본회의에서 투표할 때 제대로 알 수 있다”며 “사후 심사보다는 사전 심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태훈/이심기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