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승자 없는 삼성가 상속소송
불륜, 배신과 복수, 유산 다툼은 한국 재벌 드라마의 단골 3종 세트다. 작년 말 방송된 ‘상속자들’ ‘황금의 제국’ 등이 높은 인기를 끌었던 것도 이런 소재를 절묘하게 엮어낸 덕이었다. 기업가는 드라마 속에서 편법과 비리로 부를 쌓고, 외도를 일삼으며, 부모 형제와 재산을 다툰다.

이런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것은 실제 비슷한 사달이 나기 때문이다. 2012년 2월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장남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동생 이건희 삼성 회장을 상대로 “차명주식 존재를 몰랐으니 4조원어치의 주식을 돌려달라”고 제소한 것이다.

6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삼성가 상속소송 항소심 선고공판. 윤준 판사는 “이맹희 전 회장은 이병철 회장의 생전 의사에 따라 이건희 회장이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주식을 보유하는 것을 양해하거나 묵인한 것으로 보인다”며 원고 측 요구를 기각 또는 각하했다. 삼성가 상속소송은 2년여의 공방 끝에 이렇게 1, 2심 모두 이건희 회장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남긴 상처는 깊다. 지난 4일 대한상공회의소가 전국 남녀 1000여명을 상대로 기업호감지수를 조사한 결과 100점 만점에 51.1점에 그쳤다. 워낙 반기업정서가 퍼져있는데다 723일간 지속된 삼성가 상속소송도 부정적 영향을 줬을 것이다. 이번 소송이 또 다른 드라마나 영화 소재로 쓰여 기업인에 대한 부정적 사고를 재생산할 수도 있다. 반기업정서는 젊은이의 창업 욕구를 꺾고 경제의 발목을 붙잡는다.

2심 판결이 나온 뒤 이건희 회장 측 대리인인 윤재윤 변호사는 “원고 측의 진정성이 확인된다면 가족 차원에서 화해도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맹희 전 회장 측 차동언 변호사는 “의뢰인과 상의를 거쳐 상고 여부를 결정할 것이지만 상고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밝혔다.

재계는 삼성가의 다툼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똑같은 1, 2심 판결이 나온 만큼 더 이상의 소송전이 없길 바라고 있다. 양측은 한국의 대표 기업들을 이끄는 집안이다. 이병철 창업주가 물려준 ‘사업보국’ 이념을 되새겨 더 많은 투자와 고용으로 나라에 기여했으면 한다.

김현석 산업부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