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고이즈미의 실패한 반란
일본의 정치사학자 오다케 히데오 교토대 교수는 ‘일본형 포퓰리즘’이라는 저서에서 “포퓰리즘은 적을 향해 싸우는 영웅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극장형 정치 방식’”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일본 정치사에서 이런 ‘극장 정치’를 가장 잘 써먹은 정치인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를 꼽았다. 정치를 드라마나 영화처럼 포장하는 기술 측면에서는 고이즈미가 ‘달인’이라는 것이다.

고이즈미의 극장 정치는 정책 이슈를 군더더기 없이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게 특징이다. 그런 다음 전선을 선과 악의 대립구도로 몰고 간다. 임기 중 중의원 해산이라는 깜짝 카드를 꺼내 들었을 때도 ‘우정 민영화’라는 단순한 주제와 ‘관료’라는 악역이 동원됐다. 반사적으로 고이즈미는 사악한 관료들에게 둘러싸인 채 고군분투하는 ‘고립된 투사’ 이미지를 얻었다. 고이즈미가 5년5개월이라는 이례적인 장기집권을 이뤄낸 토대다.

이번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도 고이즈미는 같은 전법을 구사했다. 주제는 ‘탈원전’이었다. 원전 재가동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아베 정권을 악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번엔 통하지 않았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고이즈미의 수제자였던 만큼 대처가 빨랐다. 곧바로 정치권을 통해 “고이즈미가 만절(晩節·오랫동안 지켜온 절개)을 더렵혔다”는 메시지를 확산시켰다. 고이즈미에게 ‘변절자’란 이미지를 덧씌운 것이다. 거기에다 ‘무책임하다’는 비판까지 첨가했다. 결과는 고이즈미의 완패로 끝났다. 지원사격한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총리는 당선은 커녕 3위에 그쳤다.

고이즈미는 유권자의 마음을 읽는 데 실패했다. 마이니치신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어떤 정책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투표했느냐는 질문에 전체의 32%가 ‘저출산·고령화와 복지’라고 응답했다. ‘원전 및 에너지’를 고른 응답자는 21%로 세 번째였다. ‘로맨스 영화’를 보고 싶은 유권자들에게 ‘액션 영화’를 틀고 호객행위를 한 셈이다.

고이즈미의 반란은 실패했다. 중간평가의 도마에 올랐던 아베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기세등등해졌다. 기존 정책에 대한 면죄부까지 받은 아베의 우경화 폭주가 벌써부터 걱정이다.

안재석 도쿄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