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굵은 역사 담론을 유려한 문장과 이야기 속에 담아온 소설가 김탁환 씨(사진)가 작가 인생을 건 ‘소설 조선왕조실록’ 시리즈(민음사)의 첫 권을 시작하며 내놓은 출사표다. 왕조 500년 전체를 60여권이 훨씬 넘는 분량으로 담을 소설 조선왕조실록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뛰어넘을 만하다. “사실의 엄정함을 주로 삼고 상상의 기발함을 종으로 삼으면서 시대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겠다”는 일성(一聲)은 《불멸의 이순신》《열하광인》 등 35권에 달하는 조선 역사소설을 꾸준히 써냈던 그이기에 가능하다.
이 거대한 기획의 첫 번째 편은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을 담은 《혁명》(전 2권)이다. 부제인 ‘광활한 인간 정도전’에서 알 수 있듯 진정한 혁명가였던 정도전의 절망과 고뇌, 사유와 극복이 폭넓게 펼쳐진다. 집필과 구상에 약 3년이 걸린 작품은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해 힘의 공백이 생기고, 정몽주가 살해되기까지의 18일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작가는 소설적 관성을 뒤엎는다. 자극적인 영웅담, 선과 악을 손쉽게 나눠버리는 구도를 멀리하고 차라리 모호함과 인물들의 깊은 고뇌를 택한다.
서울 충정로에서 11일 만난 김씨는 “정도전을 영웅이나 천재로만 묘사하는 작품은 기존에도 있었지만 어떤 국가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 깊이 고민하고 절망했던 모습은 그려진 적이 없다”고 했다. 흔히 시대를 바꾼 영웅으로 떠받들거나 성리학 전체주의를 설계한 인물로 비판하지만, 인간 정도전의 생각과 고뇌를 풍성하고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다는 얘기다.
정도전과 이성계, 정몽주는 어떤 국가를 세울 것인지 뜻을 모은 혁명 동지였다. 맹자의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성리학적 국가, 누가 왕위에 오르든 건강하게 돌아가는 신권(臣權) 중심의 정치체제가 그 내용이다. 다만 고려라는 체제 안에서 이를 이루려 했던 정몽주와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 했던 정도전은 맞설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벌어진 균열 안에 치기 어린 이방원이 있다. 이 역학관계와 역사적 소용돌이 앞의 정도전을 작가는 그려냈다.
그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상황이 한국의 현대사와 닮았다고 했다. 민생은 어렵고 원·명 교체기처럼 국제 정세는 혼란스럽다. 정치 쇄신은 요원하다.
“처음부터 혁명하자는 사람은 없어요. 정도전도 처음엔 건의를 하다가 귀양을 가고, 절망하는 단계를 거치죠. 현재 한국 사회가 어떤 단계에 있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절망들을 잘 봐야 해요.”
하지만 역사를 단선적으로 나누는 ‘혁명론’은 아니다. 정도전의 패러다임 또한 완벽하지도, 완전히 새롭지도 않았지만 기존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유효했기에 승리했다는 것이다.
“원칙 있는 유연함을 정도전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모호함을 통해 역사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게 문학이 할 일이니까요.”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