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외국계가 잘한다는 통념
작년 1월 미래에셋자산운용에 비상이 걸렸다. 한국투자공사(KIC)로부터 “아시아 신흥국에 투자하라고 맡긴 돈 5000만달러를 전액 회수하겠다”는 통보를 받아서다. KIC한테서 일임 방식으로 자금을 맡은 지 1년5개월 만의 일이다. 미래에셋은 이 기간 아시아퍼시픽 펀드를 운용해 20%가량 수익을 냈지만 성과 비교 기준인 벤치마크 대비 부진했던 점이 발목을 잡았다.

삼천리자산운용은 작년 11월 약 6000억원을 들여 미국 가스 저장시설에 투자할 것을 국민연금에 제안했다.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를 늘리고 있어 희망적이었다. 그런데 결국 퇴짜를 맞았다. 대체투자심의위원회 소속 민간위원들이 전원 찬성했지만 내부 반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국내 운용사가 해외 투자를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가 나왔다.

불신 받는 국내 운용사 '실력'

세계 4대 국부펀드인 국민연금이 해외에 투자한 자산은 작년 8월 현재 74조원이다. 주식에 37조원, 채권에 19조원, 부동산 등 대체자산에 18조원을 각각 넣었다. 이를 위해 위탁계약을 맺은 운용사는 블랙스톤, 노무라, 모건스탠리 등 줄잡아 130여곳이다. 이 중 한국 운용사는 없다. 그러다 보니 국민연금이 해외 금융사에 지급하는 수수료만 연간 1000억원이 넘는다. “해외 시장은 외국계가 잘 안다”는 논리이지만 프랭클린템플턴, 베어링 등 외국계는 국민연금 돈을 받아 거꾸로 한국 증시에도 투자하고 있다.

외환보유액과 공공기금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자는 취지로 2005년 설립된 KIC도 다르지 않다. KIC 돈으로 해외에 투자하고 있는 토종 운용사는 삼성자산운용뿐이다. 그나마 전체 운용액 720억달러 중 0.2%에 불과하다. 나머지 위탁 자산은 전부 외국계 차지다.

안홍철 KIC 사장이 지난달 뉴욕 간담회에서 “실력이 나아질 때까지 국내 운용사에 돈을 맡길 생각이 없다”고 발언하자 국내 운용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작년 말 취임 일성으로 “KIC가 설립 취지에 부응해 왔는지 자기성찰이 필요하다”고 밝혔던 그여서다. KIC의 설립 목적은 ‘국가자산을 증대시키고 금융산업 발전에 이바지한다’이다.

동반 성장 택한 싱가포르

‘잘하는 곳에 돈을 맡긴다’는 원칙은 백번 맞는 말이다. 국내 운용사들은 먼저 착실하게 실력을 쌓아야 한다. 다만 지금처럼 해외투자 규모와 경험, 누적 수익률만을 강조하면 토종업체들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국부펀드의 해외 위탁사로 선정되기 어렵다.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외국계가 수두룩해서다. 글로벌 투자 경험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질 것이다. 국내 금융사에 시험삼아 돈을 맡겨 놓고 1년여 만에 바로 회수해도 마찬가지다.

외국계를 선호하는 국내 연기금이 해외 투자에서 항상 성공했던 것도 아니다. 2007년 글로벌 운용사인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와 함께 텍사스 발전회사 인수 과정에 참여했던 국민연금은 이 투자에선 90% 넘게 손실을 보고 있다. KIC는 2008년 BoA메릴린치 주식을 샀다가 지금도 9억달러의 평가손을 안고 있다.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싱가포르투자청(GIC)과 테마섹이 초기부터 자국 운용사의 해외 진출을 암묵적으로 지원해온 것은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다. 지금도 GIC의 이사회 멤버 13명 중 4명은 자국 운용사 대표로 구성돼 있다.

조재길 증권부 차장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