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홍철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은 일명 ‘독다방 DJ’였다. 1970년대 신촌의 랜드마크였던 독수리다방의 초대 디스크자키(DJ)로 이름을 날렸다. 얼마 전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응답하라 1994’에 등장한 다방이기도 했다. 당시 월급은 1만5000원, 커피 한잔에 20원 하던 시절. 용돈 걱정은 없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비슷한 또래인 윤형주, 송창식, 이장희와도 교분을 텄다. 그는 ‘다시 태어나면 어떤 직업을 택할 것이냐’는 질문에 주저없이 “DJ요”라고 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공무원 생활은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안 사장을 기획재정부 후배들은 ‘별종’이라고 칭한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도 뚜렷하게 갈린다. 튀려고 하지 않고, 최대한 적을 만들지 않으려는 공무원의 습성은 찾아볼 수가 없다. 행정고시(23회) 합격 후 21년 동안 국세청·재무부(현 기획재정부) 등을 거치며 정통 경제 관료의 길을 걸은 안 사장을 ‘재무부 출신 금융 공기업 사장’으로 단순하게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다시 태어나면 다방 DJ 할 것

[한경과 맛있는 만남] 안홍철 한국투자공사 사장, 대학 땐 '독다방 DJ' 명성…배짱 두둑 국부펀드 사령탑
안 사장을 지난달 28일 서울 삼청동 두부 전문점 ‘온마을’에서 만났다. 오래된 원목 식탁과 창호지로 싸인 미닫이 문, 나무 주걱으로 만든 메뉴판이 옛 시골집 같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몸에 좋은 서리태 (검은콩의 일종)로 만든 두부 맛은 최고죠. KIC 감사 시절 처음 온 곳인데, 이제 사장이 돼 다시 찾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폼도 별로 안 나고 따로 칸막이도 없는 이 식당을 찾은 이유를 물었더니 그만의 ‘30달러 더치페이 룰’을 얘기했다. 그는 국내외 고객을 만날 때 30달러 이상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 내부 윤리규정에 따른 것이다. 사기도 하고, 얻어먹을 수도 있지만 1인당 30달러를 넘겨서는 안 된다.

안 사장은 “국민의 세금으로 투자 활동을 하는 KIC 직원들은 스스로 애국자가 돼야 하고 동시에 남에게 빚을 져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런 면에서 두부는 가격과 맛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메뉴라는 것이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첫째도 둘째도 도덕성(morality)”이라는 말이 이해가 갔다. ‘애국’도 안 사장이 자주 구사하는 용어다. KIC는 얼마 전 신입-경력직 채용공고를 내면서 “세계 최고의 실력을 갖춘 애국자를 찾습니다”라는 문구를 써 눈길을 끌었다. 안 사장이 직접 쓴 것이었다.

음식이 나오면서 안 사장은 다방 DJ를 하면서 음악에 푹 빠져 살았던 20대 시절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는 부산 경남고를 나와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다니면서 공부는 뒷전이었다. 낮에는 럭비선수로, 밤에는 독수리다방 DJ를 했다.

“당시 유행하던 가벼운 록음악이나 경음악을 틀다가 사이사이에 1960년대 레너드 코헨 등의 고전음악을 섞었습니다. 요즘엔 평범한 선곡일 수 있지만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선 ‘안홍철이 음악을 좀 틀 줄 안다’며 손님들이 몰렸죠.”

그는 서울 신촌의 세브란스병원 앞 세전(世殿)다방 DJ로 유명세를 탔고, 1970~1980년대 젊은 문화의 상징이 된 독수리다방 초대 DJ로 스카우트됐다. 세전다방은 그가 DJ를 맡은 뒤 하루 매출이 5000원에서 1만원으로 올랐다고 한다.

◆잘나가는 공무원이었지만…

[한경과 맛있는 만남] 안홍철 한국투자공사 사장, 대학 땐 '독다방 DJ' 명성…배짱 두둑 국부펀드 사령탑
안 사장은 ‘고시 공부’를 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고 했다. 스스로 규율이나 관습에 얽매이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관료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사업가 기질이 다분하다’는 주변 평가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온마을의 대표 음식이 나왔다. 해물과 순두부, 각종 채소가 담겨 나오는 얼큰한 두부전골이다. 갓 구워져 나온 해물파전은 바삭거리고 재료가 오미조밀해 씹는 맛이 좋았다. 안 사장은 가벼운 소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일반적인 경제 관료가 걸어온 길과는 달랐던 그의 인생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변화가 찾아왔다. 친한 고교 선배의 따끔한 조언 때문이었다.

“그 선배는 저를 불러다 ‘홍철아 너 정도의 재능이면 여기서 일하면 안 된다.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면서 책값으로 당시엔 어마어마하게 큰 돈인 50만원을 줬습니다. 너무 편안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 길로 대학 졸업 후 다녔던 대신증권을 그만두고 행정고시를 준비했죠.”

안 사장은 잘나가는 공무원이었다. 재무부 국제금융국을 거쳐 세계은행 이코노미스트 등을 지냈다. 그런데 1999년 7년 동안의 세계은행 근무에서 돌아와 재경부에서 마땅한 자리를 못 찾고 ‘국제금융센터 부소장’으로 발령이 났다. 후배인 신제윤 금융위원장(행시 24기)의 후임이었다.

“불이익을 당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제 감각을 키운다며 해외 근무를 오랫동안 한 탓에 본부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고, 제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메릴린치 투자 건으로 KIC 떠나

안 사장은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사업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이 사실을 들은 당시 이정재 재경부 차관은 본부 과장도 거치지 않은 그를 이례적으로 부이사관(3급)으로 승진시켜준다. 안 사장의 능력을 안타깝게 생각해 그의 마음을 끝까지 돌려보려는 의도였다.

온마을의 또 다른 별미인 제육볶음이 나왔다. 화학 조미료를 전혀 넣지 않았지만 매콤하면서도 고소해 중독성이 있다. 소주가 너덧 잔 돌고 화제는 안 사장의 KIC 감사 시절로 옮겨갔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던가. 안 사장은 미국 보스턴에서 정보기술(IT) 사업 등 ‘업자’ 생활을 하다 2005년 한국투자공사(KIC) 감사직 공모에 응해 다시 공공기관에서 일하게 됐다.

KIC 감사 자리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KIC는 투자은행(IB)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세계 금융위기가 터지기 직전인 2008년 1월, 메릴린치 지분 20억달러어치를 매입했다.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주가가 급락했고, KIC는 8억달러가 넘는 손실을 봤다. 글로벌 IB들도 몸을 사리던 시절에 이 같은 투자를 결정한 KIC에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안 사장은 당시 KIC 내에서 몇 안 되는 ‘반대파’였다. 싱가포르 테마섹 등 유명 금융기관의 결정에 휩쓸려 ‘미투(me too) 투자’를 감행하면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안 사장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KIC에서 물러나게 된 이유를 물었다.

“메릴린치 투자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시점이라 투자를 늦추자고 주장했죠. 그럼에도 투자를 실행하는 상황이 불편해서 그만뒀는데…. 그러나 그 투자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기에 후회는 없습니다.”

◆CIO,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 있어

KIC 사장으로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는 그동안 비밀주의로 일관한 KIC 투자 정책을 최대한 공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공개 경영의 일환으로 그는 ‘딜 소싱 실명화’를 도입할 계획이다. 대규모 투자가 이뤄질 때 이를 결정한 책임자의 이름을 남기겠다는 것. 메릴린치 투자 사례와 같이 잘못된 투자에 대한 책임 소재를 명확히 가리자는 차원이다. 안 사장은 “내가 결정한 투자에 대해서도 명확히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라고 했다.

KIC는 앞으로 실리콘밸리의 유망 IT 벤처나 전 세계 금융, 비즈니스 서비스, 헬스케어 분야 등 유망 업체에 대한 투자를 늘릴 계획이다. 기업공개(IPO) 전의 유망 업체를 발굴, 주식형과 채권형의 중간 형태인 ‘메자닌(건물의 1층과 2층 사이에 있는 공간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투자 비율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안 사장은 “한국은행에서 200억달러의 위탁자산을 더 받아내는 등 현재 720억달러 수준인 KIC 자산 운용 규모를 올해 말까지 1000억달러 이상으로 늘릴 것”이라며 “2017년 2000억달러, 2030년 3000억달러 규모를 운용해 세계적인 국부펀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또 취임 직후 이동익 투자운용본부장(CIO)이 물러나자 후임을 공개모집 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KIC에 적합한 CIO 상을 마음 속에 두고 있다”며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실력과 인품이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안홍철 한국투자공사 사장, 대학 땐 '독다방 DJ' 명성…배짱 두둑 국부펀드 사령탑
안홍철 사장의 단골집 온마을 매일 아침 서리태 갈아 만든 두부요리

[한경과 맛있는 만남] 안홍철 한국투자공사 사장, 대학 땐 '독다방 DJ' 명성…배짱 두둑 국부펀드 사령탑
온마을은 1998년 문을 연 두부 전문점이다. 김영구 사장은 매일 아침 서리태를 직접 갈아 두부를 만든다. 방부제를 쓰지 않아 그날 만든 두부는 당일에 판매하는 게 원칙이다. 두부전골 등에도 재료 고유의 맛을 살릴 수 있도록 화학 조미료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천연재료만 쓴다. 서리태 콩과 들깨가루는 충남 부여에서 직접 재배해 가져다 쓴다.

인기 메뉴는 서리태 두부와 두부전골, 비지찌개 등이다. 여름에는 서리태로 만든 콩국수가 별미다. 국내산 삼겹살로 만든 제육볶음 역시 쫄깃한 육질에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가격은 7000~1만2000원으로 비교적 저렴하다. 영업시간은 오전 10시~오후 9시. 일요일에도 영업한다. (02)738-4231 서울 종로구 삼청동 123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