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빚 권하는 제도'부터 고쳐야
가계부채가 드디어 1000조원을 넘어섰다. 가계부채가 992조원이던 작년 4분기에 비해 한국 경제가 갑자기 위험해졌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가계부채 때문에 경제 전체가 위험에 빠질 거라는 얘기는 더 이상 뉴스거리도 안 된다. ‘이러다간 1000조 원을 넘긴다’더니 결국은 그렇게 되고 만 것이 안타까워서 하는 얘기다.

가계부채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처음 나왔던 것은 2002년 말로 기억된다. 벌써 12년 전의 일이다. 매사에 성질이 급한 한국 사람들이지만 가계부채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빨리빨리’가 아니라 ‘만만디’로 일관해 왔다. 문제가 나날이 악화돼 가는 모습을 무려 12년 동안이나 ‘신중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가 부각될 때마다 부지런히 종합대책들을 쏟아냈다. 다만 거기에 이렇다 할 알맹이가 없었을 뿐이었다.

가계부채가 지난 12년 동안 위험수위를 향해 계속 누적돼 왔던 이유는 가계와 금융회사, 그리고 감독당국 모두가 문제의 깨끗한 해결보다는 현상유지를 더 원했기 때문이었다. 가계부채를 억제할 기회를 몰라서 놓쳤다기보다는 알면서도 기회를 잡지 않았던 것이다. 가계대출 및 그와 맞물린 부동산 버블이 더 이상 커지기 전에 금리를 인상해 바람을 빼자는 의견도 이미 오래 전부터 제시됐다. 그러자 전문가라는 사람들마저 “금리를 인상하면 서민층의 부담만 늘어난다. 모처럼 살아나는 경기에 자칫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며 반대했었다. 경제정책이란 때로는 찬바람이 일 만큼 냉정해야 하는데, 정책당국은 그런 감성적인 목소리에 휘둘려 칼 한 번 제대로 빼 보지 못했다. 필요하다면 찬물이 아니라 얼음물이라도 주저없이 끼얹었어야 했는데, 미지근한 물만 조금씩 뿌리다 보니 가계부채는 어느덧 한국 경제 전체를 통째로 집어삼킬 준비가 돼 있는 거대한 쓰나미로 자라났다.

이제 가계부채가 1000조원에 이른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생활이 쪼들릴 정도로 빚이 많은 사람들은 장기적인 계획을 마련해 적극적으로 부채상환에 나서야 한다. 내가 진 빚은 내가 갚아야지 누가 대신 갚아 주겠나. 남의 눈을 의식하느라 분에 넘치는 소비를 했던 게 문제였다면 그런 사고방식은 이제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이 세상에는 당신이 어떤 소비생활을 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당신의 생각만큼 많지가 않다.

금융회사들도 가계대출을 확대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 전략인지, 단기적 수익만 따질 게 아니라, 자신의 생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각자가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런 평가의 결과,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가계대출을 과감하게 축소해 나가야 한다. 금융회사가 가계대출을 줄이려 하지 않는다면 가계대출은 절대로 줄어들지 않는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가계부채를 가시적으로 줄일 수 있었던 데에도 금융회사들의 자체적인 가계부채 축소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정책당국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금리를 적정수준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물론 금리결정에는 가계부채 외에도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많겠지만 적어도 단기적 경기상황만 생각하거나 다른 나라가 어떻게 하는지에만 정신이 팔려 국내 경제의 장기적 펀더멘털이 악화되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박혀 있는 ‘빚 권하는 제도’들도 하나씩 하나씩 없애 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서민들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결과적으로 서민의 빚만 잔뜩 늘려 놓는 정책들은 더 이상 되풀이하지 말았으면 한다.

박종규 <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jkpark@kif.r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