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28사단 포병대대 부대 안에서 기념촬영한 윤용택 당시 소위.
1966년 28사단 포병대대 부대 안에서 기념촬영한 윤용택 당시 소위.
나는 1961년 대학 3학년 때 국내 처음 도입된 학생군사훈련단(ROTC·성균관대)에 1기로 입단했다. 그러나 집안 경제사정 때문에 학업을 일시 중단하게 돼 입단과 동시에 휴학했다. 2년 뒤인 1963년 대학에 복학하면서 다시 ROTC 제3기로 입단했고, 1965년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내게는 학군단 1기와 3기 모두가 군대 동기생인 셈이다. 1기는 입단 동기생이고, 3기는 훈련 동기생이자 임관 동기생이 된 것이다.

임관 뒤 경기 양평에 있는 28사단 273포병대대에 배치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마부대가 월남에 파병되는 바람에, 복무 중이던 부대가 전방 연천지역으로 이동하면서 군자산 관측소(OP)에서 관측장교로 6개월간 근무했다. 이어 지휘소대장 보직을 받게 됐다.

1960년대 중반 당시의 군 생활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음식과 군복뿐만 아니라 다른 보급품 지원도 항상 모자랐다. 겨울 맹추위 속에서 야간 보초를 서는 게 힘들어 탈영하는 병사도 있었고, 후방 병원에 후송되기 위해 자해하는 병사도 있었다. 그리고 가족 모르게 노름판에 빠진 하사관도 있었다. 그러나 병영생활은 상하 위계질서가 매우 엄격했고 군인정신 및 사명감 또한 철저했다.

나는 병영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름대로의 신조를 가졌다. 그것은 바로 ‘배려와 나눔’이었다.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군생활 내내 부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실천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당시 내무반 사고뭉치였던 주먹패 두목 출신 김모 이병과는 전역 뒤에도 서신 연락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육군본부에서 병장으로 복무 중 전역을 앞두고 사고를 치는 바람에 이병으로 강등돼 전방에 재배치된 상태였다. 나는 전방으로 옮겨온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애로사항도 들어줬다. 제대한 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연락하는 사이가 됐다. 연락병으로 근무하던 이모 상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역 후 은행 지점장이 된 이 상병과 지금까지 안부를 나누고 있다. 이외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는 많았다.

나눔에 대한 신조는 군에 들어오기 전부터 굳게 갖고 있었다. ROTC 학창시절 단돈 몇 십원이 없어서 시내버스를 타지 못하고, 성균관대가 있는 서울 명륜동에서 미아리 고개를 넘어 집이 있는 길음동까지 도보로 통학하기 일쑤였다. 걸어가면서 스스로에게 읊조렸다. “내가 어렵게 생활한 만큼 나중에 남을 도울 수 있는 위치가 된다면 조그만한 기쁨이라도 함께 나누리라.”

나의 나눔은 현재 ROTC 후배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2004년부터 매년 15명 내외의 성균관대 ROTC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면서 나의 신조를 실천하고 있다. 일반 대학생과는 달리 ROTC 후보생들을 장학금 수혜대상자로 선정하게 된 것은 군사훈련, 학교교육, 학비 또는 생계비 등 여러 가지 부담 중에서도 군사훈련을 더 이수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에 학교 생활에 전념하라는 뜻에서다.

그런데 요즘 ROTC를 지원하는 학생들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1970년대 중반 15 대 1에 달했던 학군단 후보생 경쟁률이 지난해 2.4 대 1로 떨어졌다. 일반 대학생들에 비해 취업 준비가 힘들고 일반 병사(21개월 복무)에 비해 복무기간(28개월)이 긴 것이 이유라고 한다. 정부는 ROTC 군 복무기간을 약간 줄이고 기업들은 ROTC 출신 장교들의 채용에 보다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야 우수한 장교 요원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윤용택 < 용마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