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거칠고 부실한 모습
모두 도덕 수준 낮아 비롯된 결과들
시장의 몫 늘리고 신뢰도 높여야
복거일 < 소설가·경제평론가 eunjo35@naver.com >
지난 17일 경주
에서 체육관 지붕이 무너져 많은 사상자들이 났다. 갓 대학에 들어간 젊은이들이라 가슴이 더욱 저리면서도, 우리 사회의 거칠고 부실한 모습이 새삼 드러나서 쓰리고 답답하다.
경찰 수사엔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는 이미 안다.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지. 건물이 지어질 때부터 사고가 날 때까지, 관련된 사람들이 할 일들을 조금씩 소홀히 하거나 원칙을 어겨서 사고의 조건들이 충족된 것이다. 즉 이번 사고의 원인은 우리 사회의 풍토다. 일마다 거칠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작은 자기 이익을 위해 양심이나 규범을 쉽게 어기고, 부패하지 않은 구석이 드문 풍토에선 그런 사고들이 자꾸 일어날 수밖에 없다.
사회의 중심적 문제는 구성원들이 자기 이익을 추구해서 반사회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막는 일이다. 유전자들이 모인 유전체로부터, 세포들이 모인 다세포 유기체를 거쳐 개체들이 모인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들은 이 문제에 나름으로 대처해서 응집력을 확보해야 존속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들은 본질적으로 응집력이 약한 데서 나온 현상들이다.
동물 사회는 혈연을 통해서 응집력을 확보한다. 유전자들을 공유한 개체들은 서로 도우므로, 지나치게 이기적인 행동으로 사회를 해치지 않는다. 생물학자들이 ‘친족선택’이라 부르는 이 원리는 모든 사회들의 근본 원리다.
문화가 발전해서 사회가 커진 인류의 경우 혈연만으로 응집력을 확보할 수 없다. 낯선 사람들이 어울리는 사회에선 협력해서 보다 큰 이익을 얻는 행태가 두드러진다. 이런 상호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가 혈연을 보완함으로써, 인류는 다른 사회적 종들보다 훨씬 번창한다. ‘보이지 않는 손’은 그런 사정을 그린 비유다.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서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신뢰는 도덕이 제공한다. 사람은 도덕적으로 살아갈 잠재적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다. 그런 잠재적 능력이 다듬어져 우리는 ‘도덕적 동물’이 된다.
우리 사회는 역사적으로 높은 도덕을 함양하지 못했다. 특히 시장이 발달하지 못해서 상호적 이타주의를 연마할 기회가 적었다. 도덕이 낮으므로 우리 사회는 신뢰가 적고 모든 면들에서 거래 비용이 높다. 자연히 삶이 비효율적이고 질도 낮다. “한국엔 횡단보도가 없다”는 외국인들의 냉소 및 어처구니 없는 이번 사고와 ‘전관예우’라는 부정은 서로 연관이 없는 듯하지만, 실은 모두 낮은 도덕이라는 흙에서 자란 초목이다.
당연히 우리는 도덕적 사회를 만들려 애써야 한다. 그것이 근본적 처방이다. ‘대못과 손톱 밑 가시를 뽑는’ 일도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는’ 일도 본질적으로 힘센 자들의 부도덕을 억제하는 일이다. 우리 사회의 도덕을 전반적으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나와야 그런 대책들이 효과를 볼 수 있다.
시민들의 도덕 수준을 끌어올리는 일은 물론 무척 어렵고 더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일을 외면할 수 없다. 도덕 수준이 더 낮아지는 것이라도 막아야 한다. 도덕 수준을 높이는 길도 잘 알려졌다. 도덕이 상호적 이타주의에 기여하는 것이므로, 상호적 이타주의가 활발하게 작용하도록 하면 된다.
근본적 처방은 상호적 이타주의가 두드러진 시장의 몫을 늘리고 정부의 몫을 줄이는 것이다. 액튼 경의 말대로,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 꼭 필요한 것은 도덕을 어긴 행위들을 엄격하게 응징하는 것이다. 상호적 이타주의의 필수 조건은 배신에 대한 응징이다. 이른바 ‘되갚기(tit-for-tat)’다. ‘상호적’이란 말에 그런 뜻이 담겼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우리 사회는 이런 처방들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이런 추세를 돌려야 한다. 역사는 보여준다. 도덕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한 지도자가 나오면 사회가 상당히 달라진다는 것을. 근년에 우리 사회에선 도덕을 강조한 정치 지도자가 없었다. 역사의 평가를 생각하게 마련인 정치 지도자가 음미할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