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화', 사춘기 소녀들의 유서쓰기
“파도에 닳아진 한 조각 조가비를 입에 물고, 나는 천천히 잠들려 한다.”

창문 너머로 커다란 사과나무가 보이는 가톨릭계 여고 문예반실. 다섯 명의 문예반 학생이 매일 방과 전후에 모여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이들이 무료함을 달래며 주로 하는 놀이는 ‘수업놀이’. 일종의 즉흥 연극놀이다. 사과나무 꽃잎이 하얗게 날리는 4월의 마지막 날 수업놀이 선생이 된 나나코는 자신이 쓴 소설 ‘달의 얼룩’의 마지막 장인 ‘유서’의 한 대목을 읽어주고는 ‘유서쓰기’ 수업을 진행한다. 가오리, 지하루, 후유미, 나쓰코는 한 명씩 돌아가며 각자 쓴 유서를 낭독한다.

서울 동숭동 대학로예술극장 3관에서 공연 중인 연극 ‘정물화’의 하이라이트 부분이다. 극의 초반부터 수채화 같은 감성으로 조금씩 드러내며 켜켜이 쌓이던 다섯 소녀의 정서와 개성, 교감과 관계가 ‘유서쓰기 수업’에서 오롯하게 다가온다. 삶을 성찰하는 문학적 대사에 녹아든 사춘기 소녀들의 예민한 감수성이 마음 속으로 파고드는 울림이 작지 않다.

‘정물화’는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가 스무살에 쓴 희곡이다. 단 하루 동안 문예반실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사랑과 질투, 삶과 죽음에 대한 관심,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과 일탈 등 사춘기 시절의 고민과 감성을 담아낸다. 원작을 번역하고 각색한 연출가 성기웅의 섬세하고 세련된 연출과 무대가 인상적이다. 투명한 복도 벽과 때때로 영상을 비추는 스크린이 되는 반투명 창문 등 세트와 조명을 적절히 활용해 소녀들의 세밀한 감정 변화와 미묘한 감정의 떨림까지 잡아내 전달한다.

담배를 피우다 걸린 나쓰코를 위해 후유미가 언니의 유서 문제를 들고 나와 수녀에게 ‘협박’하는 장면 등 이야기 전개에 매끄럽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질풍노도기에 있는 소녀의 불안정한 감정의 표출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문학성이 충만한 연극이다. 전수지(나나코) 류혜린(후유미) 김희연(나쓰코 역) 박민지(치하루) 서미영(카오리) 등 다섯 배우들이 좋은 호흡과 연기를 보여준다.젊은 층은 물론 중장년들에게도 바쁜 일상 뒤편에 깊숙이 묻어둔 감성을 되살릴뿐 아니라 사춘기를 겪고 있거나 곧 겪을 자녀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줄만한 무대다.공연은 내달 16일까지, 2만5000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