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정치권력에 치인 관료들의 한숨
“벙어리 냉가슴이죠. 대통령이 돋보이기 위해서 기획재정부가 죽어야 한다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5일 오전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담화문을 발표하던 시간, 기재부 공무원들은 사전에 준비한 300쪽 분량의 설명자료를 추려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초 기재부가 짠 3개년 계획의 얼개는 ‘3대 전략, 15대 핵심과제’로 구성됐다.

하지만 발표 15분 전에 확정된 대통령 담화문에 맞춰 핵심과제가 9개로 대폭 간소화됐다. 핵심만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청와대의 결정이었다.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면서 현오석 부총리의 브리핑도 취소됐다. 대신 기재부 담당국장이 예고에 없던 마이크를 잡았다. 사전에 배포한 자료 중 담화문에 없는 내용은 혁신과제에서 제외됐다는 해명을 위해서였다. 그 결과 당초 기재부가 만든 100개 과제 중 절반 가까이가 ‘없던 일’이 돼 버렸다.

관련 조직은 망연자실했다. 선임 부처로서의 자부심은커녕 50일간 공들인 ‘작품’이 무참히 난도질 당한 것이다. 한 공무원은 “제품을 만드는 생산부서와 세일즈를 담당하는 판매부서 간 의견차가 컸다”며 “관료들이 정치 권력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느냐”고 푸념했다.

취임 1주년에 맞춘 이벤트의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 대통령이 직접 ‘등판’하는 것으로 세일즈 방식이 결정되면서 제품 구성도 막판에 대폭 손질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야기된 혼선과 비난은 기재부가 감당해야 했다. 체면도 크게 구겨졌다. 기재부가 들러리 신세로 전락한 데 대한 자조의 목소리는 26일에도 계속됐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청와대가 의사결정체계의 정점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실제 정책을 생산해내는 공무원들의 사기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분간 이런 상태를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현 부총리와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이날 예정에 없던 언론 브리핑을 하기 위해 정부세종청사를 방문했다. 혁신 3개년 계획의 첫 후속조치인 임대시장 활성화 방안을 적극 홍보하라는 청와대의 ‘동원령’이 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