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법률과 산술에 정통하고, 영어·프랑스어·일어에 능통하다. 세계정세에 밝고 애국심이 강하며 교육으로 국가 백년대계를 세울 사람이다.” 1910년 사형 집행을 앞둔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이상설 선생을 두고 한 말이다. 고종 황제 밀사로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를 다녀온 이상설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근대교육, 특히 ‘한국 근대수학의 아버지’였다.

선생은 1870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다. 한학은 물론 근대학문을 독학한 선생은 1894년 조선 마지막 과거에 급제, 관직에 진출했다. 26세에 성균관 관장이 됐다. 이때 선생은 수학과 과학을 성균관 필수과목으로 지정했다.

학자이자 관료였던 선생의 삶은 일제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달라졌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을사오적’ 처단과 조약 파기를 촉구하는 상소를 다섯 차례나 올리고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 북간도로 옮겨간 그는 근대 민족교육의 요람 ‘서전서숙’을 세우고 자신이 직접 쓴 ‘산술신서’로 수학을 가르쳤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임무를 수행한 뒤 일제에 의해 이미 사형선고가 내려진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해외에서 활동했다. 연해주에서 13도의군을 결성해 항일의병운동에 불을 지폈고, 1914년엔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으며, 이듬해 상하이로 건너가서는 신한혁명당을 조직했다.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니, 내 몸과 유품을 모두 불태워 바다에 뿌리고 제사도 지내지 마라.” 선생은 1917년 3월2일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급환으로 별세했다.

■ 이상설

-1870년 충북 진천 출생
-1896년 성균관 관장 부임
-1906년 북간도 서전서숙 설립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1915년 신한혁명당 결성
-1917년 러시아서 별세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