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친구, 전화 그리고 울음소리
새벽 한 시, 친구가 전화를 했다. 친구는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 일찍 잠드는 모범생이다. 이런 시간에 전화할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이제까지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친구를 몰라도 한참 모른다고 할 수도 있다. 새벽 한 시, 친구가 전화할 만하다.

친구는 대뜸 자기가 고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했다. 목소리에 살짝 취기가 묻어난다. 나는 너는 훌륭하며 고칠 점이라곤 없다고 했다. 그녀는 그런 거짓말 말고 진실을 이야기하라고 했다. 나는 조금 더 생각하다가 다시 한 번 진실로 그러하다고 했다. 친구는 이번에는 화를 냈다. 그리고 울었다. 한밤중에 전화로 친구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가슴이 쿵쾅거리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나눠본 것도 참 오랜만이다. 한때 친구와 나는 늘 서로의 마음을 염탐하고 감정의 밀도를 재며 관계의 느슨함을 단속하곤 했었다. 그러나 누구나 그러하듯 우리도 나이를 먹어가며 점점 더 자주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그녀대로, 나는 나대로 ‘사느라’ 서로의 삶에 개입할 일이 점점 더 줄어들었다. 우리는 ‘사회’ 생활 하느라 너무 바쁘고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우리의 소원함을 합리화했다. 마치 어떤 선배의 농담처럼 우리만 ‘사회’ 생활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자연’ 생활을 한다는 듯이.

어쩌면 나는 그녀를 질투했을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나보다 ‘잘나가고’ 나보다 ‘더 인정받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의 우정의 역사는 질투의 시간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나는 그녀에게 얕보이고 싶지 않아 나의 ‘사회’ 생활의 고단함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럴수록 점점 더 우리가 공유할 이야깃거리는 줄어들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서로를 다만 ‘바쁜 사람’으로 치부한 채 더 이상 다가서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때로 나는 우리의 ‘쿨’한 태도가 우리의 우정을 지속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제 와서 아무것도 모르던 젊은 시절처럼 시시콜콜 서로의 삶에 개입하며 함께 울고 웃는다는 일이 상대를 성가시게 할 뿐만 아니라 새삼 멋쩍게 여겨지기도 했다. 친구 역시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제까지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친구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할 수 있다. 갑자기 친구가 전화해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말해 달라며 울기 전까지는.

그녀는 무엇을 고쳐야 할까. 그녀가 잘못한 것은 무엇일까. 사실 이런 종류의 질문 앞에서 먹먹해지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질문은 단순한 물음이 아니라 이제까지의 자기 삶에 대한 느닷없는 회의와 주저에 해당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 역시 저 질문을 모르지 않는다. 나 역시 저러한 질문을 수십 번도 더 했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저 질문의 테두리 내에 있다. 어느 누가 저런 질문의 포로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바쁘고’ ‘쿨’한 우리 모두의 가슴에는 언제나 저런 종류의 질문이 그렁거리고 있을 것이라고 감히 나는 생각한다.

친구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녀는 과감하게 전화를 했다. 한밤중에, 그녀답지 않게, 그러나 가장 그녀답게. 역시 그녀가 한 수 위다. 이러니 그녀를 질투할밖에! 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울게 내버려두었다. 우리는 모처럼 ‘쿨’하지 않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것을. 울도록 내버려두는 누군가 있어서 그나마 행복하다는 것을. 아니, 한밤중 불현듯 울며 전화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라는 사실을. 이제, 내 차례다.

신수정 < 문학평론가·명지대 문창과 교수 ssjjjs@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