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설비를 만드는 대기업 A사는 최근 한국전력에 장비를 납품하려다 낭패를 봤다. 한전 관계자가 “대기업은 소프트웨어를 국가기관에 납품할 수 없으니 설비 구동 소프트웨어에 대해선 별도의 허가를 받거나 중소기업에 맡기라”고 요구한 것. A사는 “장비를 우리가 만드는데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다른 기업에 맡기느냐”고 하소연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결국 모 중소기업이 전체 장비사업을 수주했다. 하지만 이 회사는 한전에 납품할 만한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만들 능력이 없었다. 이 기업은 하는 수 없이 정부 몰래 재하청을 실시해 외국계 기업에 사업을 넘겼다. 중소기업이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큰 글로벌 기업에 하청을 주는 희한한 양상이 빚어진 것이다.

[이런 규제 없애라] 발전설비 납품 대기업에 "구동 SW는 빼라"는 SW진흥법
지난해 3월 발효된 소프트웨어진흥법의 폐해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 법 24조는 대기업은 국가가 발주하는 소프트웨어 사업에 원칙적으로 참여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소프트웨어 단일 품목뿐 아니라 장비 등에 들어가는 구동 소프트웨어까지 참여를 막고 있다는 점이다.

▶본지 2013년 10월31일자 A 1, 5면 참조

물론 국방·외교·치안·전력·국가안보 등의 분야에는 제한적으로 대기업 참여를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건별로 미래창조과학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참여가 어렵다. 대기업 B사의 경우 몇 년 전 군사 장비와 구동 소프트웨어에 대해 미래부의 허가를 받고 입찰을 따냈다. 하지만 이후 똑같은 장비 발주 입찰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미래부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B사 관계자는 “이미 승인을 받은 장비와 소프트웨어인데 왜 똑같은 절차를 매번 밟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승인 기준도 모호해 공무원들이 입맛대로 판단할 소지가 다분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납품 구조가 왜곡되기 일쑤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이면계약을 맺고 중소기업이 사업을 따오면 대기업이 재하청을 받아 실제 납품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대해 미래부 관계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대기업이 재입찰을 받아 사업을 시행하면 불법이고, 아직까지 그런 사례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 하지만 업계는 “어떻게 그렇게 현실을 모르느냐”며 혀를 찬다. 한 관계자는 “누가 드러내놓고 그런 일을 하겠느냐”며 “하청-재하청 구조로 시장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고 말했다.

정보기술(IT)관련법 전문인 법률사무소 민후의 김경환 변호사는 “무리하게 만든 법 때문에 자격과 능력을 채 갖추지 못한 중소기업들에 국가 기간사업을 맡기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비정상의 정상화 차원에서라도 법 조항을 손질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남윤선/김보영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