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의 1년 예산이 10억원 정도인데, 관장이 돼서 들어와 보니 빚이 75억원이나 있어요. 그래도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날마다 신이 나고 힘이 넘쳐요. 비록 가난하지만 이제 도(道)를 펼칠 수 있게 됐으니까요.”

28일 서울 명륜동 성균관 명륜당에서 취임식을 하는 서정기 신임 성균관장(76·사진)은 26일 인사동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균관은 전임 관장의 국고보조금 횡령 사건으로 1년 가까이 내홍을 겪었다. 서 관장은 지난 13일 선거에서 5명의 후보를 제치고 임기 3년의 새 수장에 선출됐다. 그는 “다른 후보들은 전임 관장과 함께 일한 경력이 있고 대부분 돈도 많은데, 빈털터리인 내가 당선된 것 자체가 개혁이고 정화 아니겠느냐”고 했다.

1967년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졸업한 서 관장은 젊은 시절 ‘운동권’이었다. 4·19 혁명과 통일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5·16 군사반란에 반대하다 종로경찰서에 석 달 넘게 갇혀 있었고, 이 때문에 대학에서 퇴학당했다. 재입학해 졸업했으나 1979년 유신독재에 반대하다 구금되기도 했다. 이런 일로 유림에서 ‘파문’당하다시피 한 그는 동양문화연구소에서 줄곧 유교 경전을 강의하고 5경(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과 5서(논어·맹자·중용·대학·예운) 등을 새롭게 주석해 47권의 책으로 펴냈다.

평소 “유학의 아름다운 가치는 정치·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는 것보다 사회·문화적으로 문명한 시대를 건설하는 전통에 있다”고 강조해 온 그는 유교의 ‘현세행복론’을 강조했다.

“기독교에는 천당, 불교에는 극락이 있듯이 유교는 이상세계를 현세에 구현하자는 현세이상을 추구합니다.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보다 살아서 만인이 행복을 누리는 게 합리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습니까. 유림이 하늘과 귀신, 사람과 금수(禽獸)도 동의하는 왕도정치, 대도(大道)정치의 실현을 목표로 삼는 것은 이런 까닭입니다.”

유교를 고리타분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상으로 보는 데 대해서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세상 만물은 홀로 존재하면 불안하므로 반드시 짝을 지어야 온전하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상대방의 독립적인 인격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컨대 부부유별(夫婦有別)이란 부부를 차별하는 게 아니라 두 사람 모두 각별하므로 서로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임금과 신하, 어른과 아이, 벗과 학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림의 개념에 대해서도 현대적 해석을 제시했다. 서 관장은 “요순시대의 성왕유교, 공자시대의 성현유교와 그 뒤를 이은 선비유교가 지금은 통하지 않는다”며 “민중유교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상의 은공에 감사하며 제사를 지내고, 부부생활을 정결히 하면서 어른을 공경하고 친구 간에 믿음이 있고, 나라에 세금을 잘 내고 살면 모두가 유림”이라고 설명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