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자기앞수표
16세에 가출한 그는 온갖 위장술로 사람들을 속여넘겼다. 항공기 조종사들의 급여가 수표로 지급된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된 뒤 부조종사 행세를 하며 위조수표로 140만달러를 가로챘다. 가짜 의사, 변호사로도 이름을 날렸다. 다시 조종사로 위장해 유럽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5년 동안 26개국을 돌며 그가 남발한 위조수표는 250만달러(약 26억5000만원)나 됐다.

그의 이름은 프랭크 W 아비그네일 주니어. 영화와 뮤지컬로도 유명한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실제 주인공이다. FBI 최연소 지명수배자였던 그는 21세 때인 1969년 체포돼 1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수감 5년 뒤 기술을 FBI에 전수하는 조건으로 석방됐다. 정부 기관에서 범죄 관련 이론과 실무를 가르치던 그는 지금 금융사기 예방과 보안 분야 세계 최고 권위자가 됐다.

위조수표를 뿌리는 사기꾼은 어느 곳에나 있다. 가장 흔한 위조 수표는 10만원권 자기앞수표다. 요즘은 그냥 봐서는 도저히 구별할 수 없고 최신 수표감식기로도 판별하기 어려울 정도다. 신분증까지 위조한 걸 내밀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에는 영화를 방불케 하는 100억원대 위조수표 사건이 터져 온 나라가 뒤집어졌다. 은행 직원까지 낀 사기여서 충격이 더 컸다.

수표 위조의 역사는 곧 수표 발행의 역사이기도 하다. 수표는 원래 13세기 유럽 귀족들이 회계담당자나 채무자에게 보낸 지급명령서였다.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30년대 은행제도의 발달 이후였고 오늘날의 수표 형식은 1931년 제네바조약에서 정해졌다. 우리나라는 1932년 일본수표법을 준용하다 1962년 수표법 제정 후 1963년부터 시행했다.

수표 중에서도 자기앞수표는 발행인 자신을 지급인으로 정한 수표다. 발행한 은행이 도산하기 전에는 지급이 보장되므로 보증수표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가장 널리 쓰이는 지급수단인데, 문제는 위·변조가 많다는 점이다. 국내 은행들이 최근 새로운 수표를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1일 선보인 새 수표는 문자 바탕을 보라색으로 정하고, 기울이는 각도에 따라 문자 색이 변하는 특수 잉크를 썼다고 한다. 10억원 이상 수표는 발행 때 이미지를 스캔했다가 지급 때 대조하기로 했다. 하지만 위·변조의 역사는 악순환을 되풀이한다. 해킹이나 탈세처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의 연속이다. 그 무한반복의 연결고리가 허망한 탐욕이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그러니, 참 마음이 편치 않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