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블라인드 테스트
몇 년 전이다. 워싱턴의 지하철역에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길거리 악사로 변신해 클래식 곡을 연주했다. 45분간의 연주 동안 수천명이 지나갔지만 귀를 기울인 사람은 7명뿐이었다. 청바지 차림의 그를 알아본 사람도 없었다. 그는 조슈아 벨이었다. 그가 들고 연주한 바이올린은 1713년에 제작된 350만달러(약 37억원)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

이 실험은 비싼 돈을 내고 거장의 콘서트에 가는 이유가 단지 음악을 좋아해서만은 아니라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른바 블라인드 테스트(blind test) 결과도 그렇다. 상품명이나 제조회사를 가리기 때문에 가장 객관적인 평가법으로 간주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똑같은 와인에 상표만 다르게 붙인 실험에서 평가자 대부분이 고급 상표를 좋은 와인으로 꼽은 것도 마찬가지다. 와인의 맛과 향뿐만 아니라 거기에 담긴 브랜드에 더 홀린 것이다.

얼마 전 서울대 연구팀의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 참가자의 70.8%가 국산 맥주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상표를 붙인 다음에는 정반대 결과가 나왔다. 인공조미료와 자연조미료를 대상으로 한 실험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 중반 펩시콜라의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에서도 51%가 펩시, 44%가 코카콜라를 선호했지만 브랜드명을 밝히자 정반대가 됐다. 이런 게 바로 브랜드 효과다. 구매자들이 단순히 맛보다는 뇌 속의 정보 전달 신경인 뉴런에 의해 경험이나 브랜드 등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뉴로마케팅 이론이 여기서 파생됐다.

수백 년 묵은 명기(名器)의 품질을 비교한 실험에서도 그랬다. 엊그제 프랑스 연구진이 10명의 프로 연주자에게 ‘마법의 악기’ 스트라디바리우스 5대를 포함한 고전 명품 6대와 새로 만든 바이올린 6대를 주고 눈을 가린 채 연주하게 했는데 6명이 명품보다 새 바이올린을 좋아한다고 꼽았다. 2년 전 비슷한 실험에서도 이런 결과가 나왔다.

‘우리는 왜 빠져드는가’를 쓴 미국 심리학자 폴 블룸은 우리가 감각기관의 단순한 반응을 넘어 대상의 본질에 큰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천문학적인 값의 유명 회화가 위작으로 밝혀지는 순간 휴지로 변하는 것도 작품 자체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담긴 작가의 가치가 반영된 결과라는 것이다.

뜻밖에도 미녀가 평범한 남자에게 빠지기 쉽고, 유독 이웃집 아가씨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도 그렇다고 한다. 대체 우리의 내면에는 얼마나 많은 또 다른 ‘나’가 가려져 있는 것일까.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