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ROTC 임관 뒤 유격훈련 중인 우병서 당시 소위(오른쪽).
1971년 ROTC 임관 뒤 유격훈련 중인 우병서 당시 소위(오른쪽).
‘저승사자’와 ‘염라대왕’. 광주보병학교 유격장인 동복유격장 조교의 별명은 저승사자, 유격대장의 별명은 염라대왕이다. 1971년 봄. 꽃이 피고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지만 학군단(ROTC) 9기로 소위 임관한 나는 그해 봄을 잊을 수 없다. 바로 저승사자와 염라대왕에게 받은 혹독한 훈련 때문이다.

우선 유격장까지 가는 게 장난이 아니었다. 저녁식사 후 해가 진 뒤 출발했다. 가기 전에 철모의 소위 계급장은 돌로 갈아서 없애버렸다. 계급장 떼고 훈련받기 위해서다.

빨간모자를 쓴 조교들에게 둘러싸여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옆으로 굴러’를 수없이 하면서 무등산 넘어 유격장에 도착하면 동이 트면서 아름다운 산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그런 경치를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

[1社 1병영] 우병서 사장 "해외시장 개척 비결? 유격훈련 떠올리면 못할 일 없어"
조금 뒤 단상에 시커먼 구레나룻을 기른 유격대장이 올랐다. 역시 빨간모자다. 옆에 맹견을 한 마리 끌고 단상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완전히 염라대왕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 분처럼 무섭고 위엄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수십미터를 깎아지른 듯이 우뚝솟은 바위에 줄을 매달고 오르내렸다. 사람이 가장 공포심을 느낀다는 11m 나무사다리에 올라가면 밑에서 조교들이 사다리를 흔들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대한민국 육군장교가 되는 길은 그만큼 힘들었다.

그해 3월1일 입대한 뒤 4개월간 보병 장교 교육을 마치고 강원도 화천 보병부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일반 보병이지만 그 부대의 훈련은 특수부대나 다름없었다.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달리는 산악훈련이 이어졌다. 하룻밤 새 두 개 이상의 산을 오른 적도 있다. 그전에 발생한 김신조 사건 때문에 육군 전방부대의 훈련은 특수부대 수준으로 강해졌다. 더구나 장교는 부하들의 모범이 돼야 했다. 내가 먼저 쓰러지면 안됐다. 그런 정신력으로 부대를 통솔했다.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중위 진급 대상이었지만 진급자 명단에서 누락된 것을 확인한 나는 소위 주제에 육군본부를 찾아가서 따지기도 했다. 그 결과 행정착오였다는 설명을 듣고 진급자 명단에 넣어줬다. 진급 후 대대참모로 부임한 뒤 보급관을 맡았다. 보급관이 겉으로는 편해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군량미 피복 유류뿐 아니라 취사도 담당했다. 대대원들이 먹고 입고 훈련받을 것에 대한 모든 물품과 식량을 책임지는 자리다. 이 중 일부 취사병들이 문제였다. 당시에는 타부대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병을 취사병으로 받아들인 경우가 있었다. 이들 ‘관심사병’을 통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제대를 앞둔 어느 날 연대장이 숙소를 찾아왔다. ‘우 중위는 군인 체질인데 장기복무를 지원하는 게 어떠냐’는 것이었다. ‘장기복무를 지원하면 바로 지원중대장 보직을 주겠다’는 솔깃한 제안도 해왔다. 연대장께서 나를 잘 보신 것이었다. 군인정신이 투철하고 장군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 역시 만약 장기복무를 했으면 별을 달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일본 와세다대 유학을 생각하고 있어 장기복무를 고사했다.

군생활에서의 힘든 훈련과 통솔력이 제대 후 한화그룹 근무를 거쳐 창업해 연간 500만~600만달러의 ‘작업용 비옷’을 들고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미국 캐나다 일본 등지로 수출전선을 누비며 바이어와 상담을 벌일 땐 수없이 많은 난관에 부딪친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순 없다. 돌파해야 한다. 그때마다 나는 저승사자와 염라대왕을 떠올린다. 나를 강하게 키워준 분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는 것도 그때의 정신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구레나룻 염라대왕의 소식을 알게 되면 저녁식사라도 한끼 대접하고 싶다.

우병서 < 싸이먼 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