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규제혁파, 당근책도 꺼내라
높은 자리에 오른 친구들은 통화하기도 쉽지 않다. 바쁜 탓도 있겠지만 혹시 어떤 부탁이라도 하면 거절하기 곤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사정은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정치인이 전통시장 등 특정 지역을 방문하면 영리한 주민들은 국민의 세금이 자신들을 위해 쓰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민원을 낸다. 표심을 얻어야 하는 정치인들로서는 이런 부탁을 무시할 수 없다.

높은 자리의 정치인, 예를 들어 대통령이나 총리가 그 나라의 대표적인 기업인과 은행가들을 불러 모을 때는 어떨까. 이런 자리에서는 흔히 일자리를 늘리기 위한 과감한 투자와 대출 확대가 주문된다. 관치금융 시절과는 달리 외국계 은행은 이런 회합참석을 요청받고도 외면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윤이 난다는 확신이 있음에도 투자를 꺼릴 기업가가 있을까. 돈을 떼일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업에 대출하지 않을 은행가가 있을까. 아직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면 이런 확신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상태에서 정치권의 투자 강요는 이들로 하여금 최소한의 투자 시늉만 하게 할 뿐이다.

1929년 미국 월가에서 주가가 폭락할 당시 후버 대통령은 이런 회합을 해서 기업가들에게 임금을 낮추지 말 것을 주문했고, 은행가들에게는 빌려준 돈을 갚도록 채근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불황의 원인을 생산은 넘쳐나는데 소비와 투자 같은 총수요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금문교, 후버댐 등과 같은 대형 토목사업을 벌이고 주정부 차원에서도 공공사업을 일으킬 것을 주문했다.

후버가 기업이 임금을 유지하도록 정치적 압력을 행사한 결과, 물가는 8.8% 하락했지만 임금 하락은 3%대에 그쳤다. 불황임에도 실질임금은 상승했다. 시장에서 임금은 노동생산성에 수렴하는 경향이 있는데 과소 소비이론에 따라 이 수준을 넘는 임금을 강요한 탓에 고용사정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후버 시절 기업인과 은행가 압박하기는 박근혜 정부 초기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박근혜 정부는 이런 기조에서 벗어나 규제혁파 쪽으로 정책 기조를 180도 바꾸었다. 기업인과 관료, 학자들을 모아 규제 개혁을 주제로 대토론회도 열었다. 심판대에 오른 것은 기업가와 은행가가 아니라 규제를 만들어내는 정치인과 실행하는 관료들이었다. 반가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치인과 관료들도 규제개혁 시늉에 그칠 가능성이 다분하다.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영국의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대처는 미시정치 방법으로 정치적 저항을 극복하며 대규모 공기업 민영화에 성공했고 민영화 정책을 다른 나라에 수출도 했다. 개혁에 몰두해 성공하는 것을 자신의 정치적 성취로 여기는 정치적 동지들이 있었기에, 그리고 구체적인 ‘정치적 거래’ 방식으로 민영화에 대한 저항을 극복할 수 있었기에 대처의 정책은 성공할 수 있었다.

규제는 언제나 이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수도권 입지를 규제하면, 물류비용이 높아져 소비자와 수도권 토지소유자들은 피해를 보지만 수도권에서 가장 가까우면서 수도권이 아닌 지역의 토지소유자들은 규제에 따른 이득을 얻을 수 있다. 비수도권 의원들이 대통령의 규제개혁 의지 천명에 따라 수도권 입지규제 법안을 폐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재정분권’과 같은 당근을 제공해 이런 저항을 돌파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이 미시정치다. 규제개혁은 정부마다 내건 단골 정책메뉴였지만 어느 정부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규제혁파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는 식의 안일한 착각을 해서는 공기업 개혁이나 규제개혁은 이미 물 건너 간 것이다.

김이석 < 시장경제제도연구소장 kimyisok@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