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희 SK하이닉스 미래기술연구원장은 “우수 인재를 확보해 시스템 반도체 역량을 강화하면 한국이 사물인터넷 시대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석희 SK하이닉스 미래기술연구원장은 “우수 인재를 확보해 시스템 반도체 역량을 강화하면 한국이 사물인터넷 시대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인텔은 세계 반도체 업계 1위 기업이다. 지난 20여년간 한 번도 1위 자리를 놓친 적이 없다. 그만큼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인재들도 많이 확보하고 있다. 그런 인텔에서 1년에 딱 한 명, 기술적으로 최고의 기여를 한 직원에게 주는 ‘인텔 성취상’을 세 번이나 받은 한국인이 있다. 이석희 SK하이닉스 미래기술연구원장이다.

세계 1위 기업의 저력과 반도체 업계의 현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지난 21일 경기 이천시 SK하이닉스 본사에서 만난 이 원장은 한국 반도체 업계가 직면한 현실을 날카롭게 평가했다. 그는 “메모리(데이터 저장) 반도체는 확실한 입지를 구축했지만 시스템(데이터 처리) 반도체 수준은 아직 미국 대만 등과 격차가 크다”며 “사물인터넷(IoT) 시대가 열리고 있는 지금, 관련 시스템 반도체 기술을 갖춰 놓지 않으면 컴퓨터, 휴대폰 시대와 마찬가지로 인텔 퀄컴 등이 주도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반도체 업계에 뛰어든 계기나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진대제 박사(현 스카이레이크 인큐베스트 최고경영자)의 영향이 컸습니다. 대학에서 공부할 당시 삼성전자가 미국 스탠퍼드에서 공부하고 온 반도체 전문가인 진 박사를 내세워 광고를 많이 했습니다. 그걸 보고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탠퍼드대를 택하신 거군요.

“미국에 가기 전 현대전자(SK하이닉스의 전신)에서 근무했는데 마냥 반도체가 좋았습니다. 매일 밤 늦게까지 논문을 읽고 실험하다 집에 가니 아내에게 핀잔을 듣기 일쑤였지요. 그런 과정에서 반도체 소자에 관해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됐고 업계 최대 학술지인 IEDM에 논문을 제출했지요. 그 덕분에 스탠퍼드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스탠퍼드대와 한국 대학의 반도체 교육은 어떻게 다른지.

“최신 기술 동향에 관한 연구는 한국 교수들이 미국에 뒤지지 않습니다. 다만 미국은 ‘기초 지식’을 엄청나게 강조합니다. 박사과정 때도 새로운 발견을 했다고 하면, 그 발견이 어떻게 물리학의 기초와 연결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학부 때 배운 물리학의 기초를 끊임없이 곱씹을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그런 문화 차이를 많이 느꼈습니다.”

▷기초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인가요.

“정보기술(IT)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걸 창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교과서나 논문을 봐도 기존에 없는 것을 창조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럴 때는 물리학 기초로 돌아가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원리를 생각하면서 해법을 찾아가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한국 반도체 업체가 공정기술은 강하나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데는 약한 것도 결국 이런 문제와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경쟁력 측면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메모리 분야에서는 규모의 경제를 확보해 상당기간 세계 시장을 주도할 것입니다. 20나노미터(1㎚=10억분의 1m) 이하의 D램이 나오면서 미세화가 한계에 왔다는 의견도 있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얼마든지 발전할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시스템 반도체의 상황은 만만치 않습니다. 삼성이 1990년대 초반부터 많은 노력을 해왔고, 지금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등 다양한 시스템 반도체를 만드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볼 때 한국 업계는 소자, 설계, 소프트웨어 등 전반적인 분야에서 인텔이나 대만의 TSMC보다 수준이 많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앞으로는 시스템 반도체가 중요하다고들 얘기하는데요.

“시스템 반도체는 AP를 포함해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개별 반도체가 아닌 이들을 하나로 묶는 ‘아키텍처’입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안에는 두뇌 역할을 하는 AP, 눈 역할을 하는 이미지센서 등 여러 반도체가 있습니다. 이런 반도체들이 서로 최소한의 에너지를 쓰면서 최대한의 성능을 내도록 절묘하게 구성하는 것이 아키텍처 기술입니다. PC 시대에는 인텔이 ‘X86’이라는 아키텍처로 시장을 싹쓸이했지요. 스마트폰 시대에는 ARM의 아키텍처가 시장을 장악했고요. 결국 삼성과 LG는 열심히 PC와 스마트폰을 만들 때마다 인텔과 ARM에 특허료를 줘야 했습니다. 이제는 IoT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IoT 시대에 시스템 반도체 아키텍처에 대한 기술적 주도권을 빼앗기면 한국은 또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생태계에서는 한국 기업이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IoT 시대를 주도하려면 어떤 부분을 강화해야 할까요.

“데이터를 처리하는 프로세서, 기억하는 메모리, 인식하는 센서, 전달하는 무선 인터넷 등 네 가지가 IoT의 핵심 요소입니다. 이 네 가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구동할 수 있는 기술은 소프트웨어로 귀결됩니다. 결국 우수한 소프트웨어 인재가 핵심입니다.”

▷소프트웨어 교육을 강화해야겠군요.

“맞는 얘기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한국에선 소프트웨어 교육이라고 하면 코딩(프로그래밍)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코딩은 소프트웨어 기술 중 한 분야일 뿐입니다. 아무리 코딩을 잘해봐야 선진 기업의 외주 역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아키텍처 기술을 갖추려면 소재, 반도체, 배터리, 그리고 스마트폰 등 완제품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갖춘 소프트웨어 기술자가 필요합니다. 대학 때부터 분야를 한정짓지 않는 융합 교육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미국 대만 등 반도체 선진국들은 그런 인재를 갖추고 있는지요.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대만 출신인 모리스 창(TSMC 창업자)과 젠슨 황(그래픽 반도체 업체인 미국 엔비디아 창업자)의 공통점이 뭔지 아십니까. 둘 다 스탠퍼드대에서 반도체를 전공했고요, 미국의 우수한 반도체 업체에서 오래 일했습니다. 반도체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셈이죠. 그리고 창업할 때 대만계 인재들을 싹 쓸어갔습니다. 시스템 반도체의 핵심은 결국 사람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한국 반도체 업계가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방안이 있다면.

“일단 우수한 인재를 영입해 쓸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삼고초려’가 아닌 ‘십고초려’라도 한다는 마음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닙니다. 길게는 관련 분야를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융합 교육을 강화해야 하고요. 특히 기업과 대학이 협력하는 분야가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금 대학교수 중 생산 라인에서 일해 본 경험을 가진 분이 많지 않습니다. 업계에 대한 인식도 중요합니다. ‘반도체를 열심히 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롤모델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저도 진 박사를 보며 꿈을 키웠고요. 젊은 세대는 SK하이닉스나 삼성전자에서 반도체로 성공하신 분들을 보고 미래를 설계했으면 합니다.”

▷꿈을 갖고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가 늘어날수록 한국 경제의 앞날이 밝아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텔에서 ‘인텔 성취상’을 세 번 받은 비결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려주시지요.

“타고난 자질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굳이 비결을 말하자면 ‘몰입’일 것 같습니다. 인텔의 핵심 파트에서 일하는 유일한 한국인이라는 부담감이 컸지요. 그런 책임감 때문에 대충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과제가 주어지면 해결할 때까지 물고 늘어졌습니다. 어느 날은 몇 날 며칠 고민하다 보니 꿈속에서 문제 해결의 메커니즘이 보이더군요. 인텔 사람들도 밤낮없이 일합니다. 한국 기업 못지 않죠. 하지만 결국 성공하려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 이석희 원장은

1965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에서 무기재료공학으로 학·석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 5년간 SK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 유학길에 올라 스탠퍼드에서 재료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간 인텔에서 근무했다. 처음엔 전공과 상관없는 공정팀으로 배정받아 ‘허드렛일’을 맡았다. 밤낮으로 공정상의 오류를 바로잡아야 하는 고된 일이었다. 모든 장비를 분석해 오류가 나는 근본 원인을 밝혀내고 이를 매뉴얼로 만드는 성과를 내자 회사는 연구팀으로 발령냈다. 이후 기술 개발 성과를 평가해주는 인텔 내부 최고의 상인 ‘인텔 성취상’을 3회 수상하며 핵심 인재가 된다. 임원 승진을 앞두고 노모를 돌보기 위해 귀국할 때는 인텔에서 6개월 이상 사직을 만류하기도 했다.

이후 3년간 KAIST에서 교수로 근무하다 “한국 반도체 업계에 기여하고 싶다”며 첫 직장인 SK하이닉스로 지난해 2월 옮겼다. 현재 미래 성장동력을 찾는 일을 맡고 있다.

이천= 남윤선 산업부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