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옥상에는 사슴 조각
사내 음악회도 열려
직원과 호흡 맞추려 노력
美 은행에서 근무하다 귀국
부친 회사서 기획실장 일 하다
1988년 동아알루미늄 창업
초경량 텐트폴 개발해
노스페이스 등 80개社 공급
年 1800만달러 해외 수출
인천 가좌동 수출산업단지는 오랜 역사 만큼이나 낡은 공장들이 즐비하다. 지난 수십년간 수출의 중심지로 경제발전의 중핵 역할을 했지만 근로자들이 점심식사 후 잠시 산책하거나 쉴 만한 공원을 찾기 힘들 정도로 ‘삶의 질’과는 거리가 있는 곳이다.
그런 이곳에 특이한 공장이 하나 있다. 동아알루미늄(사장 라제건·60)이다. 정문 안으로 들어서면 건물 옥상의 커다란 사슴이 눈에 들어온다. 건물 외벽은 나무 그림이 부조 형태로 조각돼 있다. 사내에는 다양한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현관 입구 연못에선 금붕어가 헤엄치고 1층 로비에는 그랜드피아노와 각종 조각들 그리고 벽난로가 자리잡고 있다. 겨울철엔 이 벽난로에서 고구마가 익어간다. 이곳에선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 층별 베란다와 옥상에는 잔디가 심어져 있다. 미술관 같은 이 건물은 라제건 동아알루미늄 사장이 심혈을 기울여 구상한 ‘작품’이다.
라 사장은 1988년 창업해 불과 10년 뒤인 1998년 신개념의 초경량 텐트폴인 ‘페더라이트(Featherlite)’를 개발해 세계시장을 휩쓸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인터뷰가 시작된 지 1시간이 넘도록 자사 제품에 대한 설명이나 자랑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친환경 작업공간’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왜 미술관 같은 건물을 지었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사람이 사는 공간, 작업자를 위한 친환경공간을 만드는 것이 자사 제품을 세계 1등 제품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나아가는 그의 전략은 종업원과 호흡을 맞추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더불어 사는 경영’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는 ‘사회에 대한 기여’를 중요한 철학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를 위해 ‘각당복지재단’에 20년 동안 약 10억원을 지원해 자원봉사자 양성과 배치 재교육 등에 나서고 있다. ‘각당(覺堂)’은 선친인 라익진 회장(1915~1990)의 호다. 각당은 무역업을 하면서 무역협회 설립의 산파역을 맡았고 체신부 차관, 상공부 차관, 산업은행 총재를 지낸 뒤 무역협회 비상근 부회장으로 서울 회현동과 삼성동 무역회관 건설을 도운 분이다. ‘사회기여’는 각당이 설립한 동아무역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다. 이 회사 직원들은 매달 영등포 사회복지관을 방문해 노인들에게 생일잔치를 해주고 있으며, 다문화가정 어린이집도 다달이 방문한다. 독거노인들이 살고 있는 참사랑복지관에 매년 설과 추석에 지원금을 보내고 있다.
그가 동아알루미늄을 창업한 데는 선친의 호출과도 관련이 있다. 연세대를 6년 다니며 역사학과와 경영학과를 졸업한 라 사장은 미시간대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친 뒤 미국 은행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금융인으로서 높은 연봉을 받으며 편하게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아무역을 운영하던 부친에게서 “이제는 돌아오라”는 말을 듣고 귀국해 이 회사 기획실장으로 일하다 1988년 동아알루미늄을 창업했다. 34세 때였다.
“이제는 나만의 우물을 팔 때가 됐다고 생각했지요.” 라 사장은 세계 1등을 할 수 있는 아이템을 찾다가 텐트폴 분야를 선택해 원재료에서 텐트 완제품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초경량 폴을 개발하면서 세계시장을 휩쓸었다.
이 폴은 기존의 조인트를 없애고 폴과 폴을 직접 결합할 수 있는 혁신적인 제품이다. “얼핏 보면 간단한 아이디어지만 이를 개발하기 위해서 수백번의 테스트를 했다”고 라 사장은 말했다. 조인트를 없앤 덕분에 무게는 기존 폴보다 18~20%가량 가벼워졌다.
그동안 동아알루미늄의 제품 품질을 신뢰하면서도 세계적 명성을 날리던 기존 텐트폴 브랜드 제품을 포기하지 못하던 해외 바이어들이 신개념 폴인 페더라이트를 보고 대부분 고객으로 돌아섰다. 경쟁사 입장에서는 일거에 거대한 쓰나미를 만난 셈이다. 한 바이어는 “고급 아웃도어업계 역사상 이렇게 단번에 주요부품 공급자가 바뀐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라 사장은 “노스페이스 등 80여개 세계 주요브랜드에 텐트폴을 공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회사의 텐트폴 수출액은 연간 약 1800만달러에 이른다. 라 사장은 “고급 텐트시장은 성장이 거의 멈춰있는 시장이지만, 수요 역시 줄어들지 않는 대단히 안정적인 시장”이라고 덧붙였다.
동아알루미늄이 선두로 올라선 것은 끊임없는 연구와 아이디어 덕분이다. 2005년에는 보잉 항공기 소재와 비슷한 수준의 경량소재인 ‘TH72M’을 개발했다. 이듬해엔 친환경피막 기술을 개발했다. 주력제품이 텐트폴이지만 단순히 폴만 개발한 게 아니다. “아마도 그동안 바이어들에게 개발해준 텐트가 1000가지가 넘을 것”이라고 라 사장은 밝혔다. 바이어를 위해 새로운 디자인의 텐트를 개발해 무상으로 넘겨줬다. 바이어들과의 신뢰가 돈독한 이유다.
그동안 OEM 수출에 주력해온 이 회사는 2011년 ‘헬리녹스(Helinox)’라는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 국내외 시장 공략에 나섰다. 태양의 신인 ‘헬리오스’와 밤의 여신인‘녹스’의 합성어다. 최고급 글로벌 브랜드를 목표로 내놓은 것이다.
그는 새로운 개념의 트레킹 폴, 초경량 의자, 테이블 등을 개발해 헬리녹스 브랜드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국내 토종 브랜드로는 드물게 독일 이스포 어워드,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등 해외에서 다양한 상도 받았다. 등산 캠핑 등 아웃도어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가볍고 튼튼한 장비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신제품인 접이용 침대 역시 혁신적인 제품이다. 라 사장은 “대부분의 침대가 접은 길이 90㎝ 안팎에 무게가 7~8㎏에 달하는데, 우리 침대는 접은 길이가 45㎝, 무게는 2㎏에 불과하면서도 엄청난 장력을 갖고 있다”며 “각국의 군대를 포함해 아웃도어, 가정 등 다양한 수요층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자적인 생산기술도 보유하고 있다. 고강도 알루미늄 튜브의 핵심 제조기술인 압출, 인발, 열처리에 관한 독자기술을 확보했을 뿐 아니라 설비도 자체 개발해 초정밀 생산기술을 갖췄다.
신개발텐트에 대한 철저한 테스트를 위해 태풍급 바람을 일으키는 풍동설비도 갖췄다. 공장에 있는 이 설비는 시속 약 160㎞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설비다. 세계 아웃도어 업계에서 최초로 확보한 시설이다.
지난 3월 초에는 가좌동 공장에서 텐트 마니아들의 모임이 있었다. 전문적인 알피니스트이거나 아웃도어 취미활동에 푹 빠진 젊은이들이다. 이들 중에는 세계적인 품질을 지닌 ‘DAC(동아알루미늄의 영어 이니셜)’를 방문한 것 자체를 감격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집단지성을 통해 신개념의 텐트를 개발하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고객의 소리를 듣기 위한 행사였다.
올해 환갑을 맞은 라 사장은 사업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회사는 아직 작은 중소기업이지요. 하지만 텐트폴 분야에서만은 선두를 달리고 있습니다. 우리 같은 회사가 1만개만 나온다면 우리나라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선친이 무역을 통한 경제발전에, 모친인 김옥라 여사가 걸스카우트 운동을 통해 여성리더 육성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는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어 한국이 세계 1등 국가로 도약하는 데 힘을 보태겠다는 소망을 갖고 있는 듯했다.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