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민 수준의 외국어 능력을 갖춘 대학생들이 정작 외국어 강의는 듣지 못한다. 외국어 특기자 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한 외국인 학생도 수업 선택에 제한을 받는 촌극이 빚어졌다.

9일 대학가에 따르면 외국어 특기자에 대한 외국어 강의 수강 제한이 논란이 됐다. 각 대학은 다양한 방식으로 수강에 제한을 두고 있다. 관련 조치가 없는 대학도 학생들이 학교 측에 특기자의 외국어 강의 수강 제한을 주문했다.

이미 어학 능력을 인정받은 특기자가 ‘외국어 능력 향상’ 목적의 기초과목을 듣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논리다.

대부분 대학은 교양 수업에서 기초 외국어 과목을 마련해 두고 있다. 학생들은 최소 이수 조건만 만족한다면 자유롭게 선택해 들을 수 있다. 해당 언어에 능숙한 외국어 특기자가 굳이 초급 외국어 과목을 수강하는 것은 손쉽게 학점을 따는 방편이 될 수 있다는 것.

고려대 총학생회는 이런 목소리를 반영해 지난 3월 외국어 특기자들의 외국어 강의 수강 제한조치 도입을 학교 측에 제안했다. 선택교양 영역의 ‘기초영어’ ‘대학영어’ 등이 대상이다. 전공 외국어 강의는 해당되지 않는다.

고려대는 수시 특별전형 중 ‘국제인재전형’과 ‘재외국민전형’을 통해 외국어 특기자를 선발하고 있다. 국제인재전형은 공인어학자격증, 공인시험성적 등으로 외국어 능력을 입증한다. 재외국민전형의 경우 해외에서 최소한 연속 3년 이상 교육과정을 이수한 학생들이 대상이다.

이상진 고려대 총학생회 교육복지국장(환경보건학과2)은 “외국어 특기자는 입학전형에서 이미 외국어 능력을 인정받은 학생들” 이라며 “대학에서 다시 외국어 능력 향상 목적의 기초 외국어 과목을 수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상대평가 방식 수업에서 특기자에 비해 일반 학생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뒤따랐다.

한양대의 경우 제2외국어 과목에 한해 해당 외국어 특기자의 수강을 제한하고 있다. 교양 ‘언어와 표현’ 영역에 개설된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수업은 해당 언어의 재외국인 특별전형 또는 외국어 특기자전형으로 입학한 학생은 수강할 수 없도록 했다.

한양대 학사팀 관계자는 “중국에서 초중고 교육과정을 이수한 외국어 특기자가 대학에서 중국어 기초수업을 듣는다고 가정해보자. 해당 학생은 매우 쉽게 학점을 딸 것이며 교수의 수업 진행에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대는 영어 점수 등 일정 기준 이상 학생의 영어과목 선택을 제한했다. 영어를 공식어로 쓰는 해외 학교에서 5년 이상 공부했거나 TEPS 성적이 800점을 초과하는 학생은 교양 고급영어 과목 중 ‘학술작문’ 과목 한 가지만 들을 수 있게 했다. 고급영어는 산문 학술작문 영화 연극 문화와사회 발표 문학 등 총 7가지 수업으로 구성돼 있다.

서울대 관계자는 “과목 선택 제한 기준에 해당하는 학생은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이 대다수” 라며 “이들로 인해 일반 학생들이 위축되거나 학점에서 불리하지 않도록 작문 위주 과목으로 선택을 제한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 규정이 오히려 학생의 강의 선택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고려대 측은 학생회의 특기자의 외국어 강의 수강제한 요구에 대해 “외국어 강의 수강제한은 강의 선택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어 신중한 검토가 우선돼야 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기껏 외국어에 유능한 학생을 뽑아놓고 외국어 실력 향상을 막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서울의 한 4년제대 관계자는 “불어를 잘하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 불어 특기자를 뽑아놓고 프랑스어 수업을 못 듣게 하는 셈” 이라며 “이런 점에서 외국어 강의 제한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반 학생들과의 형평성 문제나 수업 진행에 어려움이 있다면 테스트를 거쳐 해당 언어 수준별로 반을 나눠 수업하면 되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한경닷컴 박희진 기자 hotimpac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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