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前 펀드매니저 겸 가수 '마법의 성' 김광진, 숱한 굴곡에도 꾸준한 상승…내 인생 그래프 가치株 닮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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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션 김광진, 엘튼 존 노래 수천 번 연습
SM서 음반냈다 곧장 망해…'마법의 성'으로 가수 전성기
펀드매니저 김광진, "미래에셋 꺾겠다" 매일 다짐
그룹명 딴 가치주 펀드 내놔…3년간 수익률 88% '대박'
주식투자와 음악 공통점이 많다
트렌드 잘못 읽으면 낭패 보는 것도
원칙을 지키면 반전을 주는 것도 닮았다
SM서 음반냈다 곧장 망해…'마법의 성'으로 가수 전성기
펀드매니저 김광진, "미래에셋 꺾겠다" 매일 다짐
그룹명 딴 가치주 펀드 내놔…3년간 수익률 88% '대박'
주식투자와 음악 공통점이 많다
트렌드 잘못 읽으면 낭패 보는 것도
원칙을 지키면 반전을 주는 것도 닮았다
“노래를 발표했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없던 적이 있어요. 투자한 주식이 급락하기도 했죠. 주식 투자와 음악은 트렌드를 잘못 읽으면 낭패를 보는 게 똑같더라고요.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갖고 원칙을 지키면 반전이 나타난다는 공통점도 있지요.”
김광진 씨(51)는 두 개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마법의 성’이란 노래로 유명한 가수다. 또 가치주펀드를 운용하던 잘 나가는 펀드매니저였다. 지금은 펀드 운용은 하지 않지만 주식 투자강연에 주력하고 있으니 여전히 ‘증권 전문가’라 할 수 있다. 10년이 넘는 공백을 딛고 올해 그룹을 다시 결성, 음반을 낼 계획인 만큼 전직 가수로 부르는 것 역시 옳지 않다.
김씨는 자신의 인생을 “주식의 가치주 주가 그래프와 비슷하게 닮고 싶다”고 말했다. 순간순간 굴곡은 있을지 몰라도 길게 보면 꾸준히 오른쪽 위로 향하는 그런 그래프다.
펀드매니저 시절인 2009년 금융위기로 주가가 폭락할 때 크게 좌절했지만, 저평가주를 사들이며 판세를 역전시키기도 했다. 가수로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1995~2002년 발표했던 ‘여우야’ ‘동경소녀’ ‘진심’ 등의 노래는 전혀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2011년 한 음악 프로그램을 통해 그의 노래가 재조명되며 10년 만에 좋은 노래란 평을 받았다. 그래서 김씨는 더이상 ‘잊혀진 가수’로 불리지 않는다.
사실 그는 자신의 히트곡 ‘마법의 성’(1994년 발표) 노랫말처럼 평생 ‘동화 같은 삶’을 꿈꾸며 살아왔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조명을 받으며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가수가 되고 싶었다. “인천 송도중학교 다닐 때는 엘튼 존, 빌리 조엘 등의 외국 유명가수의 해적판 LP와 노래 악보를 구해서 한 곡당 1000번 넘게 듣고 연습하기도 했어요”라고 말했다.
1983년 인천 제물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을 때 ‘이젠 눈치 안 보고 노래를 맘대로 해도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당장 친구와 ‘통기타 2인조’ 그룹을 결성했다. “연세대 정문 앞에서 종종 ‘자작곡 발표회’를 열었는데 좀 부끄럽기도 했지만 정말 행복했다”고 그는 말했다.
1985년 연세대 가요제에서 1등을 하면서 가수의 꿈이 한발 더 다가왔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가수 등용문’으로 통하는 대학가요제 1차예선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던 것. 대신 학교 안에서는 노래를 좀 하는 친구로 알려져 도서관 같은 곳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꽤 있는 유명인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끌리는 여학생에게 노래를 만들어 불러주곤 했는데 번번이 퇴짜를 맞은 걸 보면 실익은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1986년 대학졸업 후 미국 미시간대 MBA(경영학석사)에 입학했다. 가수는 못 됐고 배운 건 경영학이라서 선택할 게 없었다. 하지만 음악은 힘겨운 유학생활에 뜻밖의 ‘선물’을 안겨줬다.
교내 장기자랑에서 빌리 조엘의 ‘저스트 더 웨이 유 아(Just the way you are)’를 불렀더니 미국 학생들이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 1000번 넘게 불렀던 노래다. “영어도 서툰 동양인이 멋지게 부르니 미국 아이들이 깜짝 놀랐겠죠. 안 끼워주던 스터디그룹에도 들어가게 됐어요.”
학위를 따고 귀국한 뒤에도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1988년 이화여대생과 함께 팀을 이뤄 출전한 ‘이화여대 가요제’에서 1등을 하기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미국에서 ‘금융’을 전공한 그는 결국 1989년 장은투자자문에 입사했다.
하지만 운명처럼 가수의 길은 열렸다. 가수 한동준 씨가 1991년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곡을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한씨가 제가 대학교 때 만든연습 음반을 우연히 듣고서 저를 수소문했더라고요.” 그가 한씨에게 만들어준 곡은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다. 대형 연예기획사 SM의 이수만 대표가 “작곡실력이 뛰어나다”며 “정식으로 앨범을 내보자”고 제안했다. 김씨는 두말할 것 없이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1991년 10월 꿈에 그리던 정식 음반을 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잘 될 줄 알았는데 완전히 망했어요. 50만원 갖고 세 달을 버텨야 할 정도로 힘들었죠.”
하지만 ‘희망의 끈’을 놔버리진 않았다. 1993년엔 경쾌한 멜로디의 곡 ‘덩크슛’을 작곡해 가수 이승환 씨에게 줬다. 노래가 인기를 끌자 이승환 씨가 음반 발매를 제안한 것. 1994년 키보드를 치는 박용준 씨와 함께 ‘더 클래식’을 결성했다. 음반을 내려고 열심히 준비하던 중에 삼성증권 리서치센터 합격 소식도 날아왔다.
삼성맨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매된 더 클래식 1집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애널리스트로 바쁘게 일하다 보니 방송에 못 나갔지만 타이틀곡 ‘마법의 성’은 공중파 가요프로그램에서 6주 연속 1위를 했다. “처음엔 50위 안에만 들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미칠 듯이 기뻤죠. 라디오 공개방송에 갔을 때 모든 관객이 손을 잡고 ‘마법의 성’을 따라부를 때의 감동은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것 같아요.”
대박은 거기까지였다. 더 클래식은 물론 솔로로도 음반을 계속 냈지만 도통 안 팔렸다. 1997년 외환위기 땐 자의반 타의반으로 삼성증권도 그만뒀다. “2002년 솔로 4집을 냈는데 반응이 전혀 없었어요. 가족 생계도 생각해야 하고 음악하기 더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2002년 동부자산운용에 입사했다. 펀드매니저로서 수익률 싸움도 시작됐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만큼 물러설 곳이 없다는 생각으로 일했다. “여의도 동부자산운용 본사 맞은 편에 당시 잘 나가던 미래에셋자산운용 본사가 있었습니다. 매일 미래에셋 본사 1층 커피숍에 가서 ‘이 회사를 넘어서겠다’고 다짐하곤 했습니다.”
김씨의 그룹명 ‘더 클래식’을 따서 2005년 11월 출시한 ‘동부더클래식’ 펀드는 수익률 대박을 쳤다. 설정 이후 4년 동안 매년 동일한 유형 펀드의 평균 수익률을 크게 넘었다. 2006년 7월 설정된 가치주 펀드인 ‘동부더클래식 진주찾기’는 3년 동안 88.54%의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그가 “소심한 면도 있지만 지는 것은 정말 싫어한다”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2011년 김씨는 펀드매니저 일을 그만뒀다. 10년간 매일 수익률에 몰입하면서 피로해진 심신 때문이다. 잘나가는 펀드매니저인 만큼 투자자문사를 차릴 것이란 소문이 있었지만 그는 현재까지 ‘투자강연회’ 연사로만 활동 중이다. ‘강연료만으로 생활이 될까’라는 의문은 “개인적으로 투자도 하고 음원수입도 있다”는 말에서 풀렸다. 증권업계 복귀 가능성을 물었더니 “동부자산운용을 관둔 것이 아쉽긴 하지만 현재로선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왜 투자강연에 집중하느냐고 묻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몇가지 간단한 원칙만 알아도 큰 손실을 보지 않고 재산을 불릴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하늘에 운을 맡기고 투자하다가 낭패를 보는 게 안타까웠다”고 그는 말했다.
김씨는 최근 ‘더 클래식’ 멤버였던 박용준 씨와 새 음반을 준비 중이다. 그는 “음악 스타일을 주식에 비유하면 가치주”라며 “순식간에 엄청난 인기를 끄는 노래보단 꾸준하게 사랑받을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펀드매니저 김광진, 가수 김광진 중에 택한다면 무엇을 고를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한 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훌륭한 작곡가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마법의 성’ 가사에 등장하는 ‘순수한 소년’의 모습이 50을 넘긴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통기타 독학하며 작곡…틈날때마다 농구 즐겨
김광진 씨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클래식 음악’을 매일같이 접했다. 그의 부모님은 7남매에게 정서 함양을 위해 비올라 첼로 피아노 등 악기 하나씩을 배우게 했다. 5남2녀 중 막내였던 그는 바이올린을 배웠지만 악기를 다루는 데 소질이 없었다. “7남매 중에 악기 연주를 제일 못했어요. 과외 선생님한테 야단 많이 맞았죠. 그래도 형 누나들의 연주를 듣고 자란 게 음악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중학교 시절 바이올린 대신 잡은 게 기타였다. 통기타를 치는 가수가 멋있어 보였다고 한다. 바이올린보다 비교적 연주하는 것이 쉽고 화성을 느끼기에 좋은 악기라는 점도 그의 흥미를 끌었다. 그는 엘튼 존, 빌리 조엘 등 해외 유명 가수들의 악보를 구해 연습하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화성학(화음에 기초를 두고 구성 연결 음조직 등을 연구하는 분야)도 혼자 공부했다. 김씨는 “정식으로 화성학을 배우지 않은 내게 가장 큰 스승은 악보들이었다. 무작정 따라해 보면서 감을 익혔다”고 말했다.
대부분 사람이 ‘김광진’하면 먼저 떠올리는 곡은 1994년 발표한 ‘마법의 성’이다.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라는 동화 같은 노랫말과 멜로디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만화 주제가 같은 노래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멜로디가 떠올라서 빨리 썼다”고 작곡 배경을 설명했다. 결혼식 축가로 유명한 ‘사랑의 서약’은 종교적이고 성스러운 느낌의 멜로디를 만들어 놓고 자신의 결혼식을 떠올려 20분 만에 작사했다.
그가 가장 애정을 가진 곡은 무엇일까. 김씨는 “사람들의 관심을 못 받은 곡들”이라고 했다. 잘 알려진 곡 중에선 ‘진심’(1998년 발표)을 꼽았다.
음 악을 할 때 가장 마음이 편하다고 하지만 그의 취미는 따로 있다. 바로 농구다. 1990년엔 연세대에 새내기로 입학한 문경은(현 SK나이츠 감독)이란 후배가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그의 연습경기를 보러 회사를 ‘땡땡이’치고 연세대 체육관으로 갔을 정도다. 요즘은 가수 이현우 씨와 1주일에 한두 번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만나 농구를 한다.
글=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사진=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김광진 씨(51)는 두 개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마법의 성’이란 노래로 유명한 가수다. 또 가치주펀드를 운용하던 잘 나가는 펀드매니저였다. 지금은 펀드 운용은 하지 않지만 주식 투자강연에 주력하고 있으니 여전히 ‘증권 전문가’라 할 수 있다. 10년이 넘는 공백을 딛고 올해 그룹을 다시 결성, 음반을 낼 계획인 만큼 전직 가수로 부르는 것 역시 옳지 않다.
김씨는 자신의 인생을 “주식의 가치주 주가 그래프와 비슷하게 닮고 싶다”고 말했다. 순간순간 굴곡은 있을지 몰라도 길게 보면 꾸준히 오른쪽 위로 향하는 그런 그래프다.
펀드매니저 시절인 2009년 금융위기로 주가가 폭락할 때 크게 좌절했지만, 저평가주를 사들이며 판세를 역전시키기도 했다. 가수로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1995~2002년 발표했던 ‘여우야’ ‘동경소녀’ ‘진심’ 등의 노래는 전혀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2011년 한 음악 프로그램을 통해 그의 노래가 재조명되며 10년 만에 좋은 노래란 평을 받았다. 그래서 김씨는 더이상 ‘잊혀진 가수’로 불리지 않는다.
사실 그는 자신의 히트곡 ‘마법의 성’(1994년 발표) 노랫말처럼 평생 ‘동화 같은 삶’을 꿈꾸며 살아왔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조명을 받으며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가수가 되고 싶었다. “인천 송도중학교 다닐 때는 엘튼 존, 빌리 조엘 등의 외국 유명가수의 해적판 LP와 노래 악보를 구해서 한 곡당 1000번 넘게 듣고 연습하기도 했어요”라고 말했다.
1983년 인천 제물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을 때 ‘이젠 눈치 안 보고 노래를 맘대로 해도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당장 친구와 ‘통기타 2인조’ 그룹을 결성했다. “연세대 정문 앞에서 종종 ‘자작곡 발표회’를 열었는데 좀 부끄럽기도 했지만 정말 행복했다”고 그는 말했다.
1985년 연세대 가요제에서 1등을 하면서 가수의 꿈이 한발 더 다가왔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가수 등용문’으로 통하는 대학가요제 1차예선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던 것. 대신 학교 안에서는 노래를 좀 하는 친구로 알려져 도서관 같은 곳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꽤 있는 유명인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끌리는 여학생에게 노래를 만들어 불러주곤 했는데 번번이 퇴짜를 맞은 걸 보면 실익은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1986년 대학졸업 후 미국 미시간대 MBA(경영학석사)에 입학했다. 가수는 못 됐고 배운 건 경영학이라서 선택할 게 없었다. 하지만 음악은 힘겨운 유학생활에 뜻밖의 ‘선물’을 안겨줬다.
교내 장기자랑에서 빌리 조엘의 ‘저스트 더 웨이 유 아(Just the way you are)’를 불렀더니 미국 학생들이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 1000번 넘게 불렀던 노래다. “영어도 서툰 동양인이 멋지게 부르니 미국 아이들이 깜짝 놀랐겠죠. 안 끼워주던 스터디그룹에도 들어가게 됐어요.”
학위를 따고 귀국한 뒤에도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1988년 이화여대생과 함께 팀을 이뤄 출전한 ‘이화여대 가요제’에서 1등을 하기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미국에서 ‘금융’을 전공한 그는 결국 1989년 장은투자자문에 입사했다.
하지만 운명처럼 가수의 길은 열렸다. 가수 한동준 씨가 1991년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곡을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한씨가 제가 대학교 때 만든연습 음반을 우연히 듣고서 저를 수소문했더라고요.” 그가 한씨에게 만들어준 곡은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다. 대형 연예기획사 SM의 이수만 대표가 “작곡실력이 뛰어나다”며 “정식으로 앨범을 내보자”고 제안했다. 김씨는 두말할 것 없이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1991년 10월 꿈에 그리던 정식 음반을 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잘 될 줄 알았는데 완전히 망했어요. 50만원 갖고 세 달을 버텨야 할 정도로 힘들었죠.”
하지만 ‘희망의 끈’을 놔버리진 않았다. 1993년엔 경쾌한 멜로디의 곡 ‘덩크슛’을 작곡해 가수 이승환 씨에게 줬다. 노래가 인기를 끌자 이승환 씨가 음반 발매를 제안한 것. 1994년 키보드를 치는 박용준 씨와 함께 ‘더 클래식’을 결성했다. 음반을 내려고 열심히 준비하던 중에 삼성증권 리서치센터 합격 소식도 날아왔다.
삼성맨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매된 더 클래식 1집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애널리스트로 바쁘게 일하다 보니 방송에 못 나갔지만 타이틀곡 ‘마법의 성’은 공중파 가요프로그램에서 6주 연속 1위를 했다. “처음엔 50위 안에만 들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미칠 듯이 기뻤죠. 라디오 공개방송에 갔을 때 모든 관객이 손을 잡고 ‘마법의 성’을 따라부를 때의 감동은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것 같아요.”
대박은 거기까지였다. 더 클래식은 물론 솔로로도 음반을 계속 냈지만 도통 안 팔렸다. 1997년 외환위기 땐 자의반 타의반으로 삼성증권도 그만뒀다. “2002년 솔로 4집을 냈는데 반응이 전혀 없었어요. 가족 생계도 생각해야 하고 음악하기 더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2002년 동부자산운용에 입사했다. 펀드매니저로서 수익률 싸움도 시작됐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만큼 물러설 곳이 없다는 생각으로 일했다. “여의도 동부자산운용 본사 맞은 편에 당시 잘 나가던 미래에셋자산운용 본사가 있었습니다. 매일 미래에셋 본사 1층 커피숍에 가서 ‘이 회사를 넘어서겠다’고 다짐하곤 했습니다.”
김씨의 그룹명 ‘더 클래식’을 따서 2005년 11월 출시한 ‘동부더클래식’ 펀드는 수익률 대박을 쳤다. 설정 이후 4년 동안 매년 동일한 유형 펀드의 평균 수익률을 크게 넘었다. 2006년 7월 설정된 가치주 펀드인 ‘동부더클래식 진주찾기’는 3년 동안 88.54%의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그가 “소심한 면도 있지만 지는 것은 정말 싫어한다”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2011년 김씨는 펀드매니저 일을 그만뒀다. 10년간 매일 수익률에 몰입하면서 피로해진 심신 때문이다. 잘나가는 펀드매니저인 만큼 투자자문사를 차릴 것이란 소문이 있었지만 그는 현재까지 ‘투자강연회’ 연사로만 활동 중이다. ‘강연료만으로 생활이 될까’라는 의문은 “개인적으로 투자도 하고 음원수입도 있다”는 말에서 풀렸다. 증권업계 복귀 가능성을 물었더니 “동부자산운용을 관둔 것이 아쉽긴 하지만 현재로선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왜 투자강연에 집중하느냐고 묻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몇가지 간단한 원칙만 알아도 큰 손실을 보지 않고 재산을 불릴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하늘에 운을 맡기고 투자하다가 낭패를 보는 게 안타까웠다”고 그는 말했다.
김씨는 최근 ‘더 클래식’ 멤버였던 박용준 씨와 새 음반을 준비 중이다. 그는 “음악 스타일을 주식에 비유하면 가치주”라며 “순식간에 엄청난 인기를 끄는 노래보단 꾸준하게 사랑받을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펀드매니저 김광진, 가수 김광진 중에 택한다면 무엇을 고를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한 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훌륭한 작곡가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마법의 성’ 가사에 등장하는 ‘순수한 소년’의 모습이 50을 넘긴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통기타 독학하며 작곡…틈날때마다 농구 즐겨
김광진 씨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클래식 음악’을 매일같이 접했다. 그의 부모님은 7남매에게 정서 함양을 위해 비올라 첼로 피아노 등 악기 하나씩을 배우게 했다. 5남2녀 중 막내였던 그는 바이올린을 배웠지만 악기를 다루는 데 소질이 없었다. “7남매 중에 악기 연주를 제일 못했어요. 과외 선생님한테 야단 많이 맞았죠. 그래도 형 누나들의 연주를 듣고 자란 게 음악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중학교 시절 바이올린 대신 잡은 게 기타였다. 통기타를 치는 가수가 멋있어 보였다고 한다. 바이올린보다 비교적 연주하는 것이 쉽고 화성을 느끼기에 좋은 악기라는 점도 그의 흥미를 끌었다. 그는 엘튼 존, 빌리 조엘 등 해외 유명 가수들의 악보를 구해 연습하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화성학(화음에 기초를 두고 구성 연결 음조직 등을 연구하는 분야)도 혼자 공부했다. 김씨는 “정식으로 화성학을 배우지 않은 내게 가장 큰 스승은 악보들이었다. 무작정 따라해 보면서 감을 익혔다”고 말했다.
대부분 사람이 ‘김광진’하면 먼저 떠올리는 곡은 1994년 발표한 ‘마법의 성’이다.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말아요”라는 동화 같은 노랫말과 멜로디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만화 주제가 같은 노래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멜로디가 떠올라서 빨리 썼다”고 작곡 배경을 설명했다. 결혼식 축가로 유명한 ‘사랑의 서약’은 종교적이고 성스러운 느낌의 멜로디를 만들어 놓고 자신의 결혼식을 떠올려 20분 만에 작사했다.
그가 가장 애정을 가진 곡은 무엇일까. 김씨는 “사람들의 관심을 못 받은 곡들”이라고 했다. 잘 알려진 곡 중에선 ‘진심’(1998년 발표)을 꼽았다.
음 악을 할 때 가장 마음이 편하다고 하지만 그의 취미는 따로 있다. 바로 농구다. 1990년엔 연세대에 새내기로 입학한 문경은(현 SK나이츠 감독)이란 후배가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그의 연습경기를 보러 회사를 ‘땡땡이’치고 연세대 체육관으로 갔을 정도다. 요즘은 가수 이현우 씨와 1주일에 한두 번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만나 농구를 한다.
글=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사진=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