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삼류사회
110년 전인 1904년 6월15일 뉴욕 이스트강의 제너럴 슬로컴호에서 불이 났다. 불은 금방 휘발유 창고로 번졌다. 선장은 화재 소식을 듣고 “애들 말”이라며 믿지 않으려 했다. 선원들은 허둥댔다. 방재훈련을 받은 적이 없으니 당연했다. 소방 호스를 꺼냈으나 모두 썩어 있었다. 구명정도 철사로 꽁꽁 묶여 있었다.

화마는 순식간에 덮쳤다. 다급해진 부모는 아이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혀 내던졌다. 하지만 물에 뜨는 아이들은 없었다. 구명조끼가 모두 불량이었다. 1342명 중 1031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전부터도 사고가 끊이지 않던 배였다. 사후 대응마저 느려 전 국민의 공분을 샀다.

방재 선진국이라는 미국도 한때는 이렇게 삼류였다. 그러나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방재능력을 키웠다. 9·11 테러 이후에는 거의 완벽한 재난대처 시스템을 갖췄다. 삼류의 멍에를 벗는 데에는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 중국의 고대 등급제도에서 유래한 ‘삼류’는 저급한 것을 통칭하는 말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삼류국가로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우리나라 언론 표현을 기다렸다는 듯이 인용한 것이다. 사고가 난 것부터 어처구니없는 일인 데다 초동대처나 수습과정 등이 모두 엉망이었다. 하삼류(下三流) 소리를 들어도 싸다. 게다가 입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난과 원망을 쏟아낸다. 나만 빼고 모두가 나쁜 놈이라는 투다.

툭하면 거짓말과 싸움질로 밤을 새우는 삼류정치부터 그랬다. 연고주의와 보신주의로 얼룩진 삼류관료도 그렇고, 권력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삼류무사들의 칼날도 그렇다. 외교도 명분에만 집착하는 삼류외교다. 학계에도 나라 망신시키는 허위·표절 논문에 정치판만 기웃거리는 삼류학자들이 판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삼류로 몰아붙이는 이 난폭한 언어의 쏠림 현상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앞에 나서서 입방아찧기에 여념없는 사람들의 뒤에서는 말없는 다수의 이웃이 아픔을 보듬느라 땀흘리고 있다. 이들의 십시일반은 소리없이 진행된다. 기업들도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며 구호물품과 기부금을 보낸다. 모두들 익명의 동참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삼류인 것은 아니다. 결국 일류를 만드는 것은 수많은 ‘나’가 모여야 가능하다. 1, 2등은 성적으로 판가름나지만 일류, 이류는 성적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이 1등은 될 수 없지만 일류가 될 수는 있다. 다행히 우리는 그걸 알고 있다. 일류기업과 일류국가도 그렇게 가능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