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직권남용
1972년 6월,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의 재선을 획책하는 비밀공작반은 민주당 선거운동 지휘본부가 있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잠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했다. 이후 닉슨은 재선에 성공했으나 나중에 이런 사실이 발각되면서 임기 도중 사임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됐다.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처음에는 관련성을 부인하던 닉슨을 사임으로까지 몰아붙인 건 하원의 탄핵 결의였다. 하원 사법위원회는 직권남용, 사법방해, 의회모독 등으로 닉슨에 대한 탄핵을 결의했다. 특히 문제가 됐던 부분은 직권남용이었다.

직권남용의 사전적 정의는 ‘직무를 핑계 삼아 직무에서 벗어난 행위를 함부로 해 공정성을 잃는 것’이다. 대부분 나라에서 형벌로 다스린다. 우리나라 형법 제123조도 공무원의 직권남용을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있다. 닉슨 역시 사임 후 형사상 책임 문제가 거론됐다. 다만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닉슨 재임기간 중의 모든 죄에 특별사면을 발표하면서 쇠고랑은 면했다.

공무원 범죄인 직권남용죄가 적용되는 사례는 많다. 특히 공직자 비리가 빈번하게 적발되는 국내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한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가 직권남용을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태국 헌법재판소가 엊그제 잉락 친나왓 총리에 대해 직권남용을 이유로 해임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이다. 태국판 워터게이트 사건이라 부를 만하다.

헌법재판소는 잉락 총리가 2011년 국가안보위원장을 경질하고 후임에 경찰청장을 임명한 뒤, 오빠인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처남을 새 경찰청장에 임명한 것은 권력남용이라며 해임을 결정했다. 정당한 권한 행사라는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헌재는 “총리 일가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었으며 이는 헌법에 반한다”고 판결했다. 이런 것이 위헌에 해당하는지, 헌재가 최고 통치권자를 해임하는 게 옳은지, 우리 상식으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없지 않다. 태국 사회의 고질적인 정파 간, 계급 간 갈등이 낳은 결과라는 해석도 나온다.

한국에서는 세월호 참사로 공직자 직무유기가 문제인 반면 태국에선 직권남용이 정국 최대 이슈가 되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헌재 판결을 둘러싼 대규모 찬반 시위가 예정돼 있어 태국 정국이 또 한 차례 격랑 속에 빠질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혼란 때마다 지도력을 발휘해온 푸미폰 국왕이 나서야 그나마 좀 잠잠해지지 않을까 싶다. 그는 적어도 직권남용으로부터는 자유로우니까.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