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브네가 최신작인 ‘그립’ 시리즈 작품 앞에 서 있다. 베르나르브네아틀리에 제공
베르나르 브네가 최신작인 ‘그립’ 시리즈 작품 앞에 서 있다. 베르나르브네아틀리에 제공
휘갈겨 쓴 듯한 형상이 마치 한자를 빠르게 써내려 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낙서에 가깝다. 더구나 회화가 아니라 강철로 제작한 부조다. 세계적인 조각가이자 개념미술가인 베르나르 브네(73)가 한국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그립(GRIB)’ 연작이다. ‘그립’은 프랑스어로 낙서를 뜻하는 ‘그리부야즈(gribouillage)’에서 빌려온 말이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실험 정신으로 정평이 난 그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브네는 미국 작가 프랭크 스텔라와 함께 1960년대 미니멀리즘 미술을 주도한 중심인물.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그의 도전정신은 선(line)에 대한 탐구로 꽃을 피웠다. 1979년 이후 쏟아낸 대형 조각 ‘비결정적인 선(indeterminate lines)’ 연작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처음에는 직선, 호, 각 등 수학적인 선에 몰입했지만 새로움을 추구하는 그의 혁신주의는 그를 점차 규칙성과는 거리가 먼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그립’ 철제 부조와 드로잉은 그런 고뇌의 산물이다.

‘그립’ 시리즈가 탄생한 것은 2011년. 작업실 구석에 내팽개쳐진 철판 조각을 보고 우연히 영감을 얻었다. 그는 수백장의 종이 위에 낙서를 한 후 그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확대 출력했다. 다시 이것을 3.5㎝ 두께의 철판에 붙인 후 가장자리를 잘라냈다. 재료는 육중한 철판이지만 경쾌한 낙서의 선에 의해 작품의 무게감은 상쇄됐다.

이번 전시에선 12점의 그립 드로잉을 선보인다. 철제 부조인 ‘그립’이 종이 위에 휘갈긴 낙서에서 출발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그의 회화 8점도 함께 선보인다. 예술가로서의 브네의 출발점은 회화였다. 수학 공식이나 도표를 회화와 결합했던 그는 “세잔 그림에 보이는 나무들이 식물학자의 전유물이 아닌 것처럼 수학 기호도 수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며 “예술의 경계를 확장해 나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시 개막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브네는 “아내와 친구, 국가에는 충성해야 하지만 미술 전통에 대한 충성은 퇴보를 뜻한다”며 “예술가는 똑같은 현상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브네는 2011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뉴욕현대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파리 퐁피두센터 등 세계 유명 미술관 60여곳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국내에서는 2009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11년에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전시는 6월15일까지. (02)2287-3500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