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분간 마법과 환상 속에 복수와 음모, 사랑, 용서, 화해의 파노라마가 펼쳐진 ‘무인도’였던 무대는 텅 비워지고 의자들이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놓인다. ‘극장 속 극장’으로의 변신이다.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마법의 힘으로 무인도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연출’한 프로스페로는 공연을 갓 마치고 분장을 지운 노배우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극장 속 극장’에서 정리되지 않은 객석을 향해 관객의 관용과 믿음을 구하고 퇴장을 알리는 마지막 대사를 토해낸다. ‘이제 끝났구나’란 생각이 들 무렵 미리 녹음된 프로스페로의 음성이 귓속을 파고든다. “황폐한 이 고독 속에서 더 나은 삶이 시작되겠지.”

국립극단 제작, 김동현 연출로 지난 9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막이 오른 ‘템페스트’의 미덕은 마지막 장면에서 발현된다. 셰익스피어가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남긴 은퇴작에서 얘기하려 한 연극의 허구성과 삶의 무상함이 어떤 ‘템페스트’ 공연보다 강렬하고 깊이 있게 다가왔다.

다만 이 순간을 맞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 최근 1년 새 공연된 데클린 도넬란 연출이나 오태석 연출의 ‘템페스트’로 기대치가 높아진 탓일까. 프로스페로가 마법으로 창조해내는 ‘환상의 세계’의 형상화가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태풍으로 배가 난파돼 바다에 빠진 알론조 일행을 정령들이 하나하나 붙잡고 춤을 추듯 구해내는 첫 장면 빼고는 별 감흥이 일지 않았다. 프로스페로의 딸 미랜더, 괴물 캘리번 등 주요 캐릭터들에 대한 참신한 해석도 찾아볼 수 없었다. ‘템페스트’에 기대하는 희극적·환타지적 재미를 별반 만들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이 주는 묵직한 감동과 여운만으로도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무대다. 극 중 다소 경직돼 보였던 프로스페로 역의 오영수(70)는 짧은 암전 동안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쓸쓸하고 고독한 울림이었다. 극작가·배우·연출가로서 20여년간 극장에서 온갖 환상과 마법을 만들어내다 은퇴를 준비하는 셰익스피어의 모습이 보였다. 오는 25일까지, 2만~5만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