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의 건강수면숍에서 소비자들이 숙면 베개를 고르고 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의 건강수면숍에서 소비자들이 숙면 베개를 고르고 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롯데백화점이 지난달 26일 서울 소공동 본점에 국내 백화점 중 최초로 문을 연 ‘건강 수면숍’. 이곳에서는 의사처럼 흰색 가운을 입은 직원들이 손님을 맞는다. 수면 컨설팅 전문가인 필로 피터(pillow fitter)다. 체압 분석기와 경추 측정 도구를 갖추고 소비자의 수면유형을 분석해 맞춤형 수면용품을 추천해준다.

음악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진동을 발생시키는 등받이형 안마기기 ‘브릴런’(108만원), TV 프로그램 종료 후 나오는 잡음과 비슷한 ‘백색소음’을 울려 숙면 뇌파인 베타(β)파를 유도하는 ‘사운드 솔’(23만5000원), 수면 중 몸을 몇 번 뒤척이는지 나타내주는 ‘로프티 베개’(48만5000~52만5000원), 한의원이 개발한 ‘자미온다 차(茶)’(3만5000원) 등 이색 수면상품을 두루 갖췄다. 목 높이에 맞춰 게르마늄, 파이프 등을 넣어 베개를 즉석에서 제작해주기도 한다.

숙면 유도 뇌파기기부터 2400만원 새끼양 솜털 이불까지

수면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관련 용품도 다양해지고 있다. 기존의 베개, 이불, 매트리스 등 침구 중심에서 벗어나 소형가전, 세제, 먹거리 등으로 영역이 넓어지는 추세다. 임형욱 롯데백화점 선임상품기획자(CMD)는 “양질의 수면에 대한 30~50대 고객의 욕구가 높아지고 있다”며 “건강 수면숍은 세월호 여파로 홍보도 제대로 못 했는데도 보름 만에 매출이 5000만원을 넘었다”고 말했다.

고소득층을 겨냥한 ‘럭셔리 수면용품’의 약진도 눈에 띈다. 최근 백화점에는 새끼양 솜털로 만든 2400만원짜리 이불까지 등장했다. 가격이 1000만~3000만원대에 달하는 스웨덴 침대 ‘덕시아나’도 VIP 고객의 수요에 힘입어 백화점에서 두 자릿수 매출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매트리스 각도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고급 침대 ‘에르고슬립’은 올 1분기 판매량이 작년 4분기보다 세 배 뛰었다. 1인용 싱글이 335만원, 슈퍼싱글 두 개를 더한 2인용이 740만원으로 일반 침대보다 비싼 편인데도 잘나간다. 이영익 에르고슬립 홍보팀장은 “젊은 여성 직장인이 핵심 고객”이라며 “숙면의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에 명품가방 살 돈을 아껴 잠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그래픽=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그래픽=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잠 시장 선점’ 나선 기업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수면장애 진료 환자는 2008년 22만8000명에서 2012년 35만7000명으로 연평균 11.9% 증가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09년 조사 결과, 한국인의 평균 수면시간은 7시간49분으로 당시 29개 회원국 중 가장 짧았다. 수면시간이 가장 긴 프랑스(8시간50분)와는 1시간 넘게 차이가 난다. 업계 관계자들이 한국에서도 ‘슬리포노믹스(sleeponomics·수면과 경제의 합성어)’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될 것으로 내다보는 이유다.

누군가의 잠 못 이루는 고통이 누군가에겐 사업 기회가 된다. 수면 시장을 선점하려는 기업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1990년대 ‘집중력 향상기’로 유명세를 탔던 엠씨스퀘어와 침구 전문업체 까르마는 최근 ‘엠씨스퀘어 시너지’라는 베개를 내놨다. 엠씨스퀘어 소리를 들으면서 깊은 잠에 빠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체공학 베개다. 인터넷몰 G마켓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베개, 천연광물의 하나인 투르말린 원석을 갈아넣은 매트리스, 안대 겉면이 눈에 직접 닿지 않도록 만든 고급 수면안대 등 아이디어 상품이 인기다.

숙면용품 관련 중소기업들의 연합체인 한국수면환경산업협회의 임영현 회장(‘엠씨스퀘어’ 지오엠씨 대표)은 “틈새상품에는 중소기업이 강한 만큼 수면 시장의 성장은 중소기업들에 큰 기회가 될 것”이라며 “취약한 자본력을 극복하기 위해 공동 연구개발(R&D)로 수면 시장 선점에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슬리포노믹스’는 선진국형 산업

전문가들은 수면산업의 발달은 국민소득이 선진국 수준에 진입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고도담 이브자리 수면환경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국민소득이 연 2만달러에 접어들면 건강과 미(美)에 관한 수요가 높아지고, 한 단계 더 올라 2만5000달러대가 되면 숙면에 대한 수요가 높아진다는 게 각국 통계에서 입증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수면산업은 기본적인 의식주와 함께 건강·미용에 대한 욕구까지 모두 충족된 이후 꽃을 피우는 ‘선진국형 산업’이라는 얘기다.

‘슬리포노믹스’가 가장 발달한 나라로는 미국과 일본이 꼽힌다. 두 나라에서는 1990년대 수면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련 시장이 형성됐다. 초반에는 수면제 판매 증가로 시작됐지만 지금은 전문가가 추천한 수면 보조용품을 제공하는 호텔 패키지, PC방처럼 시간당 요금을 내고 쪽잠을 자는 수면 카페, 수면장애 완화에 도움을 주는 화장수, 입욕제, 음료 등으로 상품과 서비스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임현우/민지혜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