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안대희 정치쇄신특위 위원장이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회의에서 귀엣말을 하고 있다. 한경DB
2012년 9월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안대희 정치쇄신특위 위원장이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회의에서 귀엣말을 하고 있다. 한경DB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59)는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삼고초려 끝에 영입한 ‘깜짝 인사’다. 2012년 8월 새누리당 정치쇄신특위 위원장에 발탁되자 정치권에선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 노무현 정부 시절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새누리당 전신인 한나라당에 ‘차떼기당’이란 오명을 안긴 인물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朴대통령 인적쇄신 시동] "비리인사 영입땐 사퇴하겠다"…朴대통령과 각 세웠던 소신파
안 후보자는 서울대 법대 3학년 때인 1975년 만 20세의 나이에 17회 사법고시에 최연소로 합격했다. 군 법무관을 마치고 만 25세에 곧바로 검사에 임용돼 대학은 ‘중퇴’로 남았다. 검사 시절 서울지방검찰청 특수부장 등을 거쳐 2003년 사시 동기인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의해 ‘검찰의 꽃’으로 불리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에 발탁됐다. 나중에(2006년) 그를 대법관에 앉힌 이도 노 전 대통령이었다. 대검 중수부장 시절 ‘특수통’으로 이름을 날렸다. 나라종금 로비 의혹 사건 재수사에 이어 대선자금 수사를 진두지휘하면서 야당인 한나라당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권력’인 대통령 측근과 집권 여당까지 파고들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소위 ‘차떼기’로 수백억원을 받은 것이 드러나 큰 타격을 입었다. 이를 계기로 박근혜 의원이 대표로 전면에 등장했고 박 대표는 성난 여론을 달래기 위해 천막당사를 열고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다. 그 스스로도 2004년 수사를 마친 뒤 “칼에 피를 너무 많이 묻혔으니 이제 부처님께 가서 빌어야겠다”고 했을 정도다. 한나라당은 그를 “노무현 대통령의 주구”라고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 수사를 깔끔하게 마무리하면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검찰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민적 지지도 높아 당시 인터넷 팬클럽이 생길 정도였다.

‘차떼기’ 수사가 끝난 지 9년 만인 2012년,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설득으로 자신과 악연이 깊은 새누리당으로 왔다. 대법관 임기를 마친 지 48일 만이었다. 이를 두고 비판 여론이 일자 그는 “(이제까지) ‘차떼기’로 대표되는 정치구태가 계속됐다. 제가 근절 대책을 한 번 만들어보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하지만 박 후보와의 사이는 금세 틀어졌다. 박 후보가 국민 통합을 명분으로 비리 전력으로 그의 수사를 받았던 한광옥 전 민주당 상임고문을 대선 캠프에 영입하자 “무분별한 비리인사 영입은 납득할 수 없다. (그런 분이 임명되면) 사퇴하겠다”고 각을 세운 것. 그는 캠프 내 비주류로 전락했고 대선 후 곧바로 짐을 싸 새누리당 당사를 나왔다. 이후 박 대통령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공직을 맡으면 대통령에게 고언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검사 시절 흠결이 거의 드러나지 않을 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해 ‘청렴하다’는 이미지도 지녔다.

대다수 법조인이 법원이나 검찰청사와 가까운 서울 강남에 사는 것과 달리 그는 서대문구 홍은동의 아파트에서 25년 넘게 살다 최근 남산 기슭의 신축 대형 아파트로 이사했다. 재산은 대법관에서 물러난 2012년 9억9399만원을 신고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