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소년들의 왕국 공연 장면
늙은 소년들의 왕국 공연 장면
○젊은 셰익스피어의 만남

올해 이야기 마술사인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이 된다. 그의 작품도 세월을 타면서 젊은 연극연출가들에 의해 이야기가 해체되고 재구성됐다. 극적 구성과 이야기의 힘은 흘러온 세월과는 무관하다. 더 견고해 진다. 그 견고함은 현실을 그대로 투영한다. 셰익스피어의 무서운 힘이다. 원작을 그대로 수용하는 연출가들은 셰익스피어의 이야기의 무서움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현실로 그대로 투영한다. 이야기들은 살아 숨 쉬는 연극문법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연극무대를 향해 수많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그려지면서 상징과 실험으로 융합되고 비약과 축약을 넘나든다. 그의 이야기는 인간의 심장을 향한다. 송곳이 되고, 웃음이 된다. 현존하는 현실에 떠다니는 수많은 이야기와 그가 빚어 놓은 등장인물들은 450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그의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현재 현실세계를 향해 무수한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은 섬뜩하다. 위대한 이유다. 셰익스피어 이야기들은 현대연출가들에 의해 다시 녹여진다. 뼈대만 세우고 극적구성은 새롭게 건축된다. 셰익스피어 연극건축의 예술성은 ‘맛’도 다르고 ‘색’도 다르다. 그 다른 맛과 색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 게릴라극장과 충무아트홀에서 기획된 셰익스피어 연극들이다.

제목도 셰익스피어답다. 셰익스피어와 한국연극-셰익스피어 더 클래식(The Classic of Shakespeare)과 셰익스피어의 자식들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그의 동시대극(The contemporary of Shakespeare)은 충무 아트홀과 게릴라 소극장에서 뜨겁게 진행(4월23일~9월28일)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올 여름 밀양여름공연예술 축제(7월26일~8월10일)에 참여하면서 밀양연극축제에 이어지게 된다. 극단 목화의 ‘템페스트’를 시작으로 기국서, 이윤택 연출이 날카롭게 뭉치고 양정웅, 박근형 연출가들이 따끈한 셰익스피어를 들고 나온다. 놓치지 않고 봐야할 작품들이다. 힘 있는 젊은 연출가들의 참여도 두드러진다. 이채경 ‘로미오와 줄리엣 발코니 장면을 연습하다’, 백화룡 ‘길 잃어 헤매던 어느 저녁에 맥베스’, 오세혁 ‘늙은 소년들의 왕국’ 연출 등의 작품들도 셰익스피어 이야기의 다른 맛을 즐길 수 있다.

2014 게릴라극장 해외극 페스티발-셰익스피어 자식들 주제로 공연된 오세혁 연출의 ‘늙은 소년들의 왕국’은 이채경 연출 작품 두 번째로 셰익스피어를 들고 나왔다. 셰익스피어 자식들의 주제로 올리는 마지막 연출은 그가 직접 쓰고 연출한 ‘길 잃어 헤매던 어느 저녁에 맥베스’(게릴라 극장 5월22일~6월11일) 작품이 셰익스피어를 더욱 젊게 만들어내고 있다.

○ ‘리어왕’과 ‘돈키호테’가 바라본 현실풍경

영국과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가 셰익스피어(1564-1616)와 세르반테스(1547-1616)는 동시대를 살았다.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기가 막힌 스토리다. 연출은 운명 같은 이 두 사람의 죽음을 놓치지 않는다. 오세혁은 두 사람의 얘기를 꺼내든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불러내고, 돈키호테를 버무려 이야기 뼈대를 만든다. 두 인물을 꺼내든 발상 자체가 유쾌하다. 만남 자체가 흥미를 끈다. 리어는 딸들에게 버림을 받고 몰락한다. 왕국을 잃고 세상을 떠도는 인물이다. 그 인생 자체가 비극이다. 돈키호테는 미친 듯이 달리면서 그 만의 왕국을 품기 위해 모험을 즐기고 떠도는 인물이다. 좌충우돌되는 돈키호테의 인생은 희극적이다. 웃으면서 가슴이 쓰라져 진다. 몰락한 리어의 인생수업은 씁쓸하다. 오세혁 연출은 특유의 유쾌한 장난에 시동을 건다. 텅 빈 광야에 두 사람을 불러내고 죽음을 깨운다. 450년 전 그들이 꿈꾸던 세상을 세워보라고 서울역으로 툭 밀쳐놓는다.

무대는 비어있다. 변변한 연극적인 장치도 없다. 계단 구조로 된 덧 마루가 유일한 입체적 공간이다. 이 광야는 배우들의 날것의 놀이들로 꽉 채워진다. 재료도 소품 몇 가지가 전부다. 박스종이 하나가 왕국이 되고, 잠자리가 된다. 신문지는 유일하게 체온을 녹이는 놀이다. 두 사람의 현실 모험은 녹녹치 않다. 그들의 시선은 서울역에 모여든 노숙인 들로 향한다. 서울역 체험은 몰락한 리어의 왕국보다 더 잔인한 현실풍경의 재현이다. 재현의 삶은 전쟁터보다 더 아픈 현실이다. 딸들보다 더 간사하고 뒤틀린 인간들의 세상이다. 자본에 의해 익숙해진 삶이고, 희망이 없다. 돈이 없는 인간은 절망만 남고 그들을 구원해줄 인간은 없다. 보듬어 주는 현실과 마땅한 사회적 제도도 없다. 현실의 삶은 죽어 있는 삶이다.

부랑자들 보다 더 기막힌 삶이 판친다. 현실은 비극적인 영화 스토리 보다 더 강하고 잔혹한 드라마보다 극적구성이 탄탄하다. 등장인물들도 쌘 놈만 등장한다. 온갖 추악함이 버무려져 있다. 현실풍경이 영화관이고 TV연속극이다. 재미있으면 시선을 당긴다. 추악함이 과하면 대중은 외면 할 수밖에 없다. 스토리가 바꾸지 않고는 관심을 끌 수도 없다. 반복적인 코미디와 뒤틀린 스토리는 딱 한본 본 것으로 만족된다. 연속 상연을 할수록 개인의 삶에 더 깊숙이 익숙해 질뿐이다.

오세혁은 소외된 비주류 문화에 시선을 강하게 담는다. 연출의 심장은 이들이 주류다. 오히려 이들에게 한판 승부를 던진다. 민중문화를 일으켜 세우고, 소시민들을 가슴에 품은 왕국을 연극적 놀이로 세운다. 부랑자들은 소외된 민중으로 환치된다. 민중적 저항과 태도는 먹고사는 삶에 익숙해 진지 오래다. 연출은 이러한 삶과 현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유쾌한 웃음으로 던지고 놀이로 속도를 유지한다. 놀이는 자유다.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고, 종이 한 장으로 왕국도 세울 수도 있다. 오세혁 연출은 그가 마음에 품은 현실을 연극적 무대로 유쾌하게 옮겨 놓는다.

동정, 위협, 뻔뻔함, 강탈 등으로 끝판의 삶을 유지하는 그들의 기막힌 인생보다 더 코미디 같은 현실풍경은 획일적으로 붙여준 부랑자들의 삶보다도 더 뒤틀린 구조다. 소시민들이 바라보는 현실풍경에 정치인, 기업인들은 가증스러운 끝판문화에 와 있다. 냉혹한 현실과 그 틈을 현혹하는 인간들만 존재할 뿐이다. 서울역의 부랑자들이 노래한다. “바람이 불거나 말거나 천둥 번개가 치거나 말거나 우리는 잘 거야. 먹을 때 빼고는 잘거야. 우는게 무슨 소용 울고 나면 배고픈데. 웃는게 무슨 소용 웃고 나면 씁쓸한데.”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관심이 없다.

이들의 유일한 구원은 초코파이다. 극 속에 등장하는 종교인, 사이비 종교인, 야당후보, 여당후보, 자원봉사자, 진보단체, 보수단체 등 서울역에 모인 온갖 단체들은 달콤한 초코파이로 이들을 현혹한다. 자본의 상징이다. 초코파이 하나에 질서는 파괴되고 정의는 사라진다. 현실풍경을 속도감 있는 놀이풍자로 그려낸다. 그 삶에는 추악함과 익숙함만 존재할 뿐이다. 오세혁 연출은 리어왕과 돈키호테를 통해 이들의 끝판문화를 보듬고 일으켜 세운다.

○박스로 세워진 광야의 왕국

돈키호테와 리어왕이 서울역 광장 모퉁이에 박스로 그들만의 왕국을 세운다. 박스왕국 밖 풍경은 리어의 삶보다 더 비극적이고, 돈키호테보다 더 코미디다. 이 비극성과 코미디는 450년 전 보다 더 리얼한 인간풍경을 그려낸다. 냉혹한 현실만 존재하는 무질서한 풍경에서 정의감은 상실 된지 오래다. 리어의 딸들보다 더 잔혹하다. 돈키호테는 특유의 정의감이 발동한다. 돈키호테의 정의성은 굳어버린 가슴을 돌리기에는 늦었다. 녹아내지지 않는다. 대립과 싸움만 존재 된다. 익숙함은 희망이 공존 할 수 없는 무서운 삶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현실은 리어와 돈키호테도 초코파이에 익숙해 질 수밖에 없다. 오세혁은 한 인물을 설정한다. 소년을 등장 시킨다. 소년에게는 달콤한 초코파이도 살아가는 기술도 필요 없다. 작가는 꺼져가는 민중의 삶으로 부랑자들을 바라본다. 소년은 이러한 현실에 미소를 잃고 더욱 침묵한다.

위협도 공포도, 두려움도 배고픔도 견딜 수 있는 무서운 태도다. 소년에게 공포와 두려움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이 두려움은 외면의 시선이다. 희망을 마주 할 수 없다. 미소를 상실한다. 소년을 팔아 돈을 벌어야 되는 부랑자들과 리어, 돈키호테의 극적 대립은 새로운 박스왕국을 세우는 유쾌한 전쟁놀이로 이어진다. 지팡이는 칼이 되고, 종이박스는 보호막이 된다. 배우들의 숨 가쁜 박스왕국 쟁탈전은 온갖 유쾌한 전술놀이로 변화한다. 배우들 신체로 변화되는 변화무쌍한 전투태세는 속도 있는 웃음의 놀이로 치유된다.

초코파이가 그리워 질 때 까지 밀어붙이는 포위전술 놀이도 돈키호테와 리어의 자세를 무너트릴 수 없다. 박스로 세운 그들의 왕국의 유일한 백성은 소년혼자다. 작지만 마음은 견고하고 소수의 시민도 보듬는 박스왕국이다. 돈키호테와 리어왕은 박스왕국의 유일한 백성을 위해 옷을 벗어던지고 굶주린 백성을 위해 길거리 공연도 마다 하지 않는다.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답게 논다. 이 극단의 특유의 놀이성은 시선을 잡아끈다. “목사가 기도보다 헌금을 더 사랑 할 때 선생이 학생보다 촌지를 더 사랑 할 때 예술가가 정치를 하고 정치가가 예술을 할 때 세상은 망할거야.”

허술한 박스왕국은 견고한 왕국보다 훈훈하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나눔과 공정함이 균형을 이룬다. 백성을 위해 몸부림치는 ‘늙은 소년들의 왕국’의 리어와 돈키호테는 눈물겹다. 박스로 세워진 광야는 전쟁터로 변한다. 리어의 박스왕국을 그리워하는 부랑자는 배신자로 몰린다. 선택의 자유는 함몰되어 있고, 박스왕국의 이념은 충돌한다. 소년은 부랑자 (윤씨)를 위해 손을 내민다. 박스 왕국들의 치열한 육박전 놀이는 리어의 승리가 된다. 소년의 구원으로 광야는 살만한 박스왕국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들 끊는 사이렌 소리와 간사한 인간들의 탐욕의 소리로 박스왕국은 광야로 소멸된다.

2막은 현실세계다. 무대는 허술한 박스왕국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세혁은 놀이로 빈틈을 주지 않는다. 속도를 유지한다. 냉혹한 현실놀이다. 소년은 이러한 현실과 더욱 가깝게 마주 한다. 오세혁 연출의 현실의 시선은 비극이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춤을 추는 나레이터의 세계는 희극이 된다. 정치 유인물을 나누어 주는 1인 시위자의 세계는 실험극으로 바라본다. 사이비 종교세계는 선동극 이고, 밀입국한 노동자들의 세상은 잔혹극이다. 시선자체가 유쾌한 연극적 눈으로 바라본다. 리건과 거너릴의 욕망은 현실에 떠다니는 추악한 인간의 탐욕이다. 밥은 현실이고, 뻥 뚫린 가슴이다. 추잡하고 난잡한 세계다.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다. 밥그릇을 우적우적 집어삼키는 소년. 밥그릇을 비우고, 우적우적 삼킬 때 리어와 돈키호테를 구원할 수 있다는 태도다. 리어를 구출하기 위한 놀이는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배우들의 놀이성은 열기로 채워진다.

리어와 돈키호테가 다시 찾은 서울역 광장은 치열한 몸부림도 희망의 박스왕국도 존재하지 않는다. 꽃밭으로 덥혀져 있는 광야의 땅은 절망의 왕국이다. 꽃들이 숨 쉴 수 없는 흙의 광야다. 광야의 땅에 차갑게 묻혀있는 이들에게 물을 주는 사람도 시선을 주는 인간도 없다. 평온한 일상만 존재 한다. 리어와 돈키호테의 박스왕국도 희망을 품은 백성들도 광야의 땅에 소리없이 묻혀 있을 뿐이다. 격한 싸이렌 소리는 현실을 상징화 한다. 침묵으로 일관한 소년의 분노는 극한의 상태가 된다. 세상을 향한 괴성이다. 치장이 사라지고, 광야의 묻힌 따뜻한 인간의 마음을 품을 때 박스왕국에 희망을 걸 수 있다는 태도다.


○오세혁 연출의 셰익스피어 놀이와 게임의 법칙

그가 직접 쓰고 연출한 ‘늙은 노년들의 왕국. 부제: 리어와 돈키호테’는 놀이 게임의 법칙이 등장한다. 극단문패도 특이하다.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이다. 문패만 보면 세상이 무서울 것 없어 보인다. 암행어사 같다. 한 손에는 마패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돈키호테와 리어왕을 앞세우고 세상을 향해 무섭게 돌진한다. 돌진하는 방법이 특이하다. 이야기를 들고 웃으면서 달리고 전진한다. 웃고 떠들면서 할 말은 다 한다. 놀이판을 벌이면서 쉬어도 가고, 극에 웃음의 양념도 골고루 섞는다. 달려가는 골인 지점은 현실세계다. 놀이로 패스를 하고, 웃음으로 슛을 날린다. 게임 종료 시간도 없어 보인다. 배우들은 잘 노는 것이 훈련이다.

연출은 배우들과 놀면서 죽도록 달린다. 웃으면서 달리는 폼이 범상치 않아 보인다. 잘 놀지 못하면 오히려 퇴장이다. 제대로 시끌벅적하게 놀면서 달리는 대학로 젊은 연출가는 오세혁 연출이 유일한 것 같다. 놀면서 1등하는 폼이다. 연극상품을 제대로 특화 시켰다. 즉흥성은 날것의 놀이로 받고, 그 날 것의 놀이는 놀면서 더 충전되는 배우들의 에너지가 된다. 날 것의 놀이는 일상적인 반복된 습관으로 이어지는 순간 깨지고 재미가 없어진다. 이 극단의 놀이성은 철저하게 놀고 싶어서 모인 배우들 같다. 연극무대를 통해 섞어대는 재료들은 배우들의 날것 그대로다. 이 날것의 재료들은 오세혁 의 연극놀이 게임이 시작되면서 부터다. 쉬지 않고 논다. 푸짐한 연극 재료들의 음식도 없다. 오히려 재료가 많아지면 놀이는 재미가 없어진다. 잘 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놀면서 달리는 속도는 결승점에 진입하면서 더 신나게 논다.

배우들의 날것의 놀이들은 신나게 달리고 놀면서 균형을 만들고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세워지게 된다. 그의 연극게임의 방식은 철저한 놀이성이다. 정해져 있는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연극적인 중후함도, 노련한 기술도 없다. 계산된 반전도 보이질 않는다. 신나게 놀면서 틈이 생기면 그 놀이는 끝내야 한다.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은 이 날것들의 놀이들이 잘 모였다.

제도화된 연극적 규칙과 연극적 메뉴는 오히려 오세혁 연극에 틈이 생기고 갈라지게 만든다. 규칙은 할 말 다 하면서 제대로 한판 놀기다. 잘 놀지 못하면 배우들은 퇴장이다. 무섭게 잘 논다. 배우들의 퇴장도 없다. 무대에서 노는 폼은 다른 무대와 같아 보이지만 철저하게 한 가지로 달리고 논다. 장점이다. 제대로 놀아보고 무대에서 끝장을 보겠다는 태도다. 연출은 무대의 놀이성에 목숨 걸고 몰아붙인다. 놀이는 속도다. 속도의 균형이 없는 놀이는 지루해 질수 있다.

‘늙은 소년들의 왕국’의 놀이방식은 오세혁이 직접 쓴 이야기 게임을 흥미롭게 만든다. 마음으로 주어담고 찢겨진 가슴으로 품은 현실풍경은 조롱거리다. 놀면서 흉보고, 현실에서 잡아야 할 인간은 놀이로 때려 친다. 오세혁 연출의 연극문법의 특징은 관객들이 경험한 놀이의 살아있는 맛 그대로다. 배우들의 날것의 놀이들은 신나게 달리고 놀면서 균형을 만들고 이야기가 세워진다. 놀다가 멈추면 놀이는 재미가 없다. 연출이 정해놓은 놀이의 게임방식대로 끝까지 달리면서 놀 수밖에 없다. 속도를 줄여서 말을 근사하게 하고 싶고, 멈춤이 생기면 게임의 규칙이 바뀌어야 한다. 연극적 기술을 부릴 수 없다. 기술을 부리는 순간 이 놀이의 판은 깨진다. 배우들의 놀이의 몰입성은 멈춤이 없다. 몸부림에 가깝다. 극이 유지되는 이유다.

놀이를 차용한 달리기는 그래서 무섭다. 조절이 안 되면 함정에 빠지기가 쉽다. 그런데 게임 규칙을 바꾸면 오세혁 연출의 맛이 안 난다. 특성화된 무대의 놀이의 맛을 잘 우려낸다. 그러나 연극적 규칙을 바꿔도 놀이의 속도가 그대로 유지 될지는 의문이다. 이 날것 그대로의 놀이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품어낸 우리의 현실풍경을 제대로 베어내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풀어야 할 연극적 숙제다. 배우들이 날 것으로 너무 잘 놀아서 그렇다.

공연 리뷰/김건표(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뮤지컬·공연예술 평론/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