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공무원에서 공연계 '대부'로…무사안일주의 날리니 창작 뮤지컬 '흥행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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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행정의 '마에스트로'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
서울 흥인동 충무아트홀에서 지난 18일 막을 내린 ‘프랑켄슈타인’은 창작 뮤지컬의 새 역사를 썼다. 제작비 40억원을 들인 이 작품은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 속에 총 89회 공연에 8만여명을 동원했고 10억원대 이익을 남겼다. 창작 뮤지컬 사상 최고의 흥행 성적이다. 이 작품은 충무아트홀이 올해 개관 1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자체 기획, 제작한 뮤지컬이다. 총 제작비의 40%인 15억원은 자체 투자했고 나머지는 민간 자금을 유치했다.
27일 충무아트홀 집무실에서 만난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79)에게 축하 인사부터 건넸다. 작년 이맘때 같은 장소에서 당시 야심차게 기획 중이던 ‘프랑켄슈타인’에 대해 얘기를 나눴을 때만 해도 이 사장 스스로 흥행 성공 가능성에 대해선 반신반의했다.
“공공 극장이 나서서 창작한 작품이 성공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죠. 성남아트센터에 있을 때 제작한 뮤지컬 ‘남한산성’도 작품성은 평가받았지만 흥행엔 실패했거든요. 이번엔 모든 면에서 성공했어요. 특히 공연 비수기로 외국 라이선스 작품들도 고전하는 상황에서 계속 1위를 차지하며 거둔 성적이라 더 고무적이에요.”
이 사장은 ‘프랑켄슈타인’ 성공의 공을 실무진에 돌렸다.
“장기적인 기획으로 엄청난 노력을 들였어요. 실무를 총괄한 김희철 공연사업본부장이 장인정신을 가지고 달려들어 수고했어요. 아랫사람 칭찬은 잘 안 하는데 김 본부장은 우리나라 공연기획자 중 제일 앞서가는 사람이에요. 제가 ‘사람 복’은 좀 있는 거 같아요.”
하지만 ‘예술 행정의 마에스트로’라 불리는 이 사장 특유의 공연장 경영 철학과 뚝심, 강한 추진력이 없었다면 ‘프랑켄슈타인’은 탄생하지 못했을 거라는 평가다. 그는 공연장이 평소 대관에만 의존하거나 공동 투자라는 명목으로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공연장 최고경영자(CEO)로 부임할 때마다 그는 직원들에게 먼저 “공연장 종사자는 결코 대관 도장만 찍어주는 ‘창고지기’가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투자를 늘리든지 직접 기획에 참여하고 자체 콘텐츠를 만들어낼 것을 강하게 주문한다.
“제가 가장 싫어하고 경계하는 게 무사안일주의예요. 직원들에게 항상 창조적이고 능동적으로 일하도록 요구하고 격려합니다. 실무자가 ‘프랑켄슈타인’ 기획안을 들고 왔을 때 ‘우리 한번 의지를 가지고 함께 성공시켜 보자’고 했어요. 사장과 실무자가 따로 노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엔 일치가 됐죠.”
그는 1963년 문화공보부 문화과로 발령난 이후 50여년간 ‘예술 행정’ 한길을 걸었다. 원래 영화과를 지원했는데 “유혹이 많은 자리는 가지 않는 게 좋다”는 고종사촌 매형의 충고를 받아들여 공연을 비롯해 문학, 건축 등 다양한 예술 분야를 총괄하던 문화과를 지원한 것이 그의 인생을 결정했다. 1983년까지 문공부에서 일했고 이후 문화예술진흥원 상임이사와 서울예술단장을 거쳐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성남아트센터 등 국내 대표 공연장의 수장을 지냈다.
그는 ‘내 인생의 전성기’로 문화과와 예술과, 공연과 등에서 주사, 계장, 사무관을 거쳐 과장까지 공연예술인들과 부대끼며 지낸 시기를 꼽는다. 위세도 등등했다.
1972 년 봄, 해군부대 벚꽃놀이 가든 파티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공연을 준비하느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사무관 이종덕을 박정희 대통령이 호출했다. 그가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근무할 당시 구내 이발소나 체조장에서 자주 마주쳤던 얼굴을 기억해낸 박 대통령이 반가운 마음에 불러 옆자리에 앉혔다.
“지금 어디서 근무하고 있나?” “문공부 공연과에서 무대공연을 맡고 있습니다. 지금 공연 중인 한국민속무용단(현 국립무용단)을 인솔하고 왔습니다. 이번 뮌헨올림픽 개회식에 한국민속무용단이 참여하고, 이후 국가사절단으로 24개국 순회공연을 하는데 제가 인솔자로 갑니다.”
옆에 앉은 육영수 여사가 한마디 했다. “이번에 가실 때 의상이며 소품이며 최고급으로 신경 많이 써서 준비해주세요.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기회이니 좋은 이미지를 줘야죠.” 박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장관에게 말해. 내가 지시하는 거라고.” 그는 그렇게 박 대통령 내외 곁에 30여분간 앉아 있었다. 행사장에 있던 외교 사절단과 정부 고위 관료들은 공연보다 그를 더 주목했다.
“제가 실세 중 실세라고 소문이 쫙 났어요. 문공부에선 장관도 못하는 일을 이종덕은 할 수 있다는 식으로요. 계속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었어요. 전보다 더 많은 예술인들이 저를 찾아왔어요. 허허.”
그에게 ‘공연계 대부’란 수식어가 따라붙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다. 워낙 사람을 사귀고 돕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공무원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을 마음을 터놓고 대했고 존중했다. 그들이 활동하는 데 지장을 주는 걸림돌을 치우고 고충을 해결하는 데 발벗고 나섰다. 공무원에 이어 공연장 CEO로 경력을 이어가면서 ‘예술가들의 부탁을 들어주는 활동’은 지속됐다.
“고등학교 때도 ‘대부’란 별명이 있었어요. 기질이 원래 그런 데다 영화 ‘대부’의 말런 브랜도를 좀 닮았었거든요, 하하. 뭔가 부탁을 받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즉시 알아보고 되든 안 되든 바로 연락을 줍니다. 부탁한 입장에선 기다리는 시간에 얼마나 애가 타는지 잘 알거든요. 공무원 때도 ‘놓고 가라’는 얘기를 한 적이 없어요.”
문화예술계 에서 그가 ‘인맥의 황제’로 불리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예술행정 분야 후배들에게도 자주 얘기해요. 예술인들과 마음을 열고 오랜 기간 관계를 이어가라고요. 인간적으로도 좋고 공연장 CEO로서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가 폭넓은 네트워크거든요.”
그가 수장을 맡은 공연장 순서는 ‘예술의전당(정부 산하)-세종문화회관(서울시)-성남아트센터(성남시)-충무아트홀(중구청)’로 일반적인 경우와 다르다. 운영 주체와 예산, 규모, 공연계 위상 등을 고려하면 공연장의 ‘급’이 계속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자존심이 상하진 않았을까.
그는 사무실 벽면에 걸린 한 액자를 가리켰다. 그가 세종문화회관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 평소 가깝게 지내던 고(故) 구상 시인이 직접 시를 짓고 써서 보내준 친필 액자다. 제목은 ‘꽃자리’다. ‘앉은 자리가/꽃자리니라/네가 시방/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바로 꽃자리니라’
“그때 혹시나 제 마음이 편치 않을까봐 보내주신 것이죠. 이후 자리를 옮길 때마다 마음을 다잡아주는 중심추가 돼줬어요. 공무원 그만둘 때 앞으로 예술행정의 경력을 살려 공연예술 부문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고, 그때그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왔어요. 자리보다는 ‘너의 그 앉은 자리에서 꽃을 피우는’ 게 중요한 거죠. 앞으로도 문화예술계에서 제가 가진 경험과 인맥이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면 어떤 자리에서든 능력이 될 때까지 열심히 할 거예요.”
앞으로 20년은 오디세우스처럼…이종덕 사장의'100세론'
올해 팔순을 맞은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은 ‘100세 시대’를 준비하며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를 떠올렸다고 했다.
“100세 시대에 속할 수 있으면 제게 남은 시간은 20년입니다. 20년은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터로 떠나 10년을 싸우고 다시 10년간 갖은 모험 끝에 집으로 돌아온 ‘오디세이아’의 시간입니다.”
이 사장의 ‘20년 계획’은 이렇다. 공연예술 분야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이고 강직한 원로의 역할을 다하는 것, 이를 위해 오디세우스처럼 싸우고 모험하는 자세로 살아가 장차 후회 없는 100세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 는 앞으로 주어질 일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건강 관리’를 강조한다. 그의 딱 벌어진 어깨와 당당한 체격은 ‘무도인’을 연상시킨다. 이 사장은 중학교 때부터 유도를 했고 대학에선 레슬링으로 몸을 단련했다. 이후 평생을 거르지 않고 아침 운동을 해오고 있다. 요즘도 매일 오전 6시부터 피트니스클럽에서 1시간30분가량 운동한 뒤 공연장으로 출근한다. 러닝머신에서 30분쯤 뛰고, 5㎏짜리 아령을 100번씩 들고, ‘레그 익스텐션’이란 허벅지 운동을 한다.
“건강한 정신과 추진력은 건강한 신체에서 나와요. 정신과 육체를 하나로 묶어 늘 극기훈련하듯 긴장감을 놓지 않고 사는 게 가장 젊게 사는 방법입니다.”
그는 한창 정열적으로 일할 40~60대 ‘청년들’에게 노년을 대비해 “체력에 맞는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라”고 권한다. “팔순이라니까 피트니스클럽 코치가 깜짝 놀라던, 그런 즐거움을 누리기를 바라요. 일단 건강한 몸 상태를 유지하면서 무엇을 할 것인지 찾아야죠.”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
27일 충무아트홀 집무실에서 만난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79)에게 축하 인사부터 건넸다. 작년 이맘때 같은 장소에서 당시 야심차게 기획 중이던 ‘프랑켄슈타인’에 대해 얘기를 나눴을 때만 해도 이 사장 스스로 흥행 성공 가능성에 대해선 반신반의했다.
“공공 극장이 나서서 창작한 작품이 성공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죠. 성남아트센터에 있을 때 제작한 뮤지컬 ‘남한산성’도 작품성은 평가받았지만 흥행엔 실패했거든요. 이번엔 모든 면에서 성공했어요. 특히 공연 비수기로 외국 라이선스 작품들도 고전하는 상황에서 계속 1위를 차지하며 거둔 성적이라 더 고무적이에요.”
이 사장은 ‘프랑켄슈타인’ 성공의 공을 실무진에 돌렸다.
“장기적인 기획으로 엄청난 노력을 들였어요. 실무를 총괄한 김희철 공연사업본부장이 장인정신을 가지고 달려들어 수고했어요. 아랫사람 칭찬은 잘 안 하는데 김 본부장은 우리나라 공연기획자 중 제일 앞서가는 사람이에요. 제가 ‘사람 복’은 좀 있는 거 같아요.”
하지만 ‘예술 행정의 마에스트로’라 불리는 이 사장 특유의 공연장 경영 철학과 뚝심, 강한 추진력이 없었다면 ‘프랑켄슈타인’은 탄생하지 못했을 거라는 평가다. 그는 공연장이 평소 대관에만 의존하거나 공동 투자라는 명목으로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공연장 최고경영자(CEO)로 부임할 때마다 그는 직원들에게 먼저 “공연장 종사자는 결코 대관 도장만 찍어주는 ‘창고지기’가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투자를 늘리든지 직접 기획에 참여하고 자체 콘텐츠를 만들어낼 것을 강하게 주문한다.
“제가 가장 싫어하고 경계하는 게 무사안일주의예요. 직원들에게 항상 창조적이고 능동적으로 일하도록 요구하고 격려합니다. 실무자가 ‘프랑켄슈타인’ 기획안을 들고 왔을 때 ‘우리 한번 의지를 가지고 함께 성공시켜 보자’고 했어요. 사장과 실무자가 따로 노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엔 일치가 됐죠.”
그는 1963년 문화공보부 문화과로 발령난 이후 50여년간 ‘예술 행정’ 한길을 걸었다. 원래 영화과를 지원했는데 “유혹이 많은 자리는 가지 않는 게 좋다”는 고종사촌 매형의 충고를 받아들여 공연을 비롯해 문학, 건축 등 다양한 예술 분야를 총괄하던 문화과를 지원한 것이 그의 인생을 결정했다. 1983년까지 문공부에서 일했고 이후 문화예술진흥원 상임이사와 서울예술단장을 거쳐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성남아트센터 등 국내 대표 공연장의 수장을 지냈다.
그는 ‘내 인생의 전성기’로 문화과와 예술과, 공연과 등에서 주사, 계장, 사무관을 거쳐 과장까지 공연예술인들과 부대끼며 지낸 시기를 꼽는다. 위세도 등등했다.
1972 년 봄, 해군부대 벚꽃놀이 가든 파티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공연을 준비하느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사무관 이종덕을 박정희 대통령이 호출했다. 그가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근무할 당시 구내 이발소나 체조장에서 자주 마주쳤던 얼굴을 기억해낸 박 대통령이 반가운 마음에 불러 옆자리에 앉혔다.
“지금 어디서 근무하고 있나?” “문공부 공연과에서 무대공연을 맡고 있습니다. 지금 공연 중인 한국민속무용단(현 국립무용단)을 인솔하고 왔습니다. 이번 뮌헨올림픽 개회식에 한국민속무용단이 참여하고, 이후 국가사절단으로 24개국 순회공연을 하는데 제가 인솔자로 갑니다.”
옆에 앉은 육영수 여사가 한마디 했다. “이번에 가실 때 의상이며 소품이며 최고급으로 신경 많이 써서 준비해주세요.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기회이니 좋은 이미지를 줘야죠.” 박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장관에게 말해. 내가 지시하는 거라고.” 그는 그렇게 박 대통령 내외 곁에 30여분간 앉아 있었다. 행사장에 있던 외교 사절단과 정부 고위 관료들은 공연보다 그를 더 주목했다.
“제가 실세 중 실세라고 소문이 쫙 났어요. 문공부에선 장관도 못하는 일을 이종덕은 할 수 있다는 식으로요. 계속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었어요. 전보다 더 많은 예술인들이 저를 찾아왔어요. 허허.”
그에게 ‘공연계 대부’란 수식어가 따라붙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다. 워낙 사람을 사귀고 돕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공무원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을 마음을 터놓고 대했고 존중했다. 그들이 활동하는 데 지장을 주는 걸림돌을 치우고 고충을 해결하는 데 발벗고 나섰다. 공무원에 이어 공연장 CEO로 경력을 이어가면서 ‘예술가들의 부탁을 들어주는 활동’은 지속됐다.
“고등학교 때도 ‘대부’란 별명이 있었어요. 기질이 원래 그런 데다 영화 ‘대부’의 말런 브랜도를 좀 닮았었거든요, 하하. 뭔가 부탁을 받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즉시 알아보고 되든 안 되든 바로 연락을 줍니다. 부탁한 입장에선 기다리는 시간에 얼마나 애가 타는지 잘 알거든요. 공무원 때도 ‘놓고 가라’는 얘기를 한 적이 없어요.”
문화예술계 에서 그가 ‘인맥의 황제’로 불리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예술행정 분야 후배들에게도 자주 얘기해요. 예술인들과 마음을 열고 오랜 기간 관계를 이어가라고요. 인간적으로도 좋고 공연장 CEO로서 갖춰야 할 덕목 중 하나가 폭넓은 네트워크거든요.”
그가 수장을 맡은 공연장 순서는 ‘예술의전당(정부 산하)-세종문화회관(서울시)-성남아트센터(성남시)-충무아트홀(중구청)’로 일반적인 경우와 다르다. 운영 주체와 예산, 규모, 공연계 위상 등을 고려하면 공연장의 ‘급’이 계속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자존심이 상하진 않았을까.
그는 사무실 벽면에 걸린 한 액자를 가리켰다. 그가 세종문화회관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 평소 가깝게 지내던 고(故) 구상 시인이 직접 시를 짓고 써서 보내준 친필 액자다. 제목은 ‘꽃자리’다. ‘앉은 자리가/꽃자리니라/네가 시방/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바로 꽃자리니라’
“그때 혹시나 제 마음이 편치 않을까봐 보내주신 것이죠. 이후 자리를 옮길 때마다 마음을 다잡아주는 중심추가 돼줬어요. 공무원 그만둘 때 앞으로 예술행정의 경력을 살려 공연예술 부문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고, 그때그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왔어요. 자리보다는 ‘너의 그 앉은 자리에서 꽃을 피우는’ 게 중요한 거죠. 앞으로도 문화예술계에서 제가 가진 경험과 인맥이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면 어떤 자리에서든 능력이 될 때까지 열심히 할 거예요.”
앞으로 20년은 오디세우스처럼…이종덕 사장의'100세론'
올해 팔순을 맞은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은 ‘100세 시대’를 준비하며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를 떠올렸다고 했다.
“100세 시대에 속할 수 있으면 제게 남은 시간은 20년입니다. 20년은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터로 떠나 10년을 싸우고 다시 10년간 갖은 모험 끝에 집으로 돌아온 ‘오디세이아’의 시간입니다.”
이 사장의 ‘20년 계획’은 이렇다. 공연예술 분야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이고 강직한 원로의 역할을 다하는 것, 이를 위해 오디세우스처럼 싸우고 모험하는 자세로 살아가 장차 후회 없는 100세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 는 앞으로 주어질 일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건강 관리’를 강조한다. 그의 딱 벌어진 어깨와 당당한 체격은 ‘무도인’을 연상시킨다. 이 사장은 중학교 때부터 유도를 했고 대학에선 레슬링으로 몸을 단련했다. 이후 평생을 거르지 않고 아침 운동을 해오고 있다. 요즘도 매일 오전 6시부터 피트니스클럽에서 1시간30분가량 운동한 뒤 공연장으로 출근한다. 러닝머신에서 30분쯤 뛰고, 5㎏짜리 아령을 100번씩 들고, ‘레그 익스텐션’이란 허벅지 운동을 한다.
“건강한 정신과 추진력은 건강한 신체에서 나와요. 정신과 육체를 하나로 묶어 늘 극기훈련하듯 긴장감을 놓지 않고 사는 게 가장 젊게 사는 방법입니다.”
그는 한창 정열적으로 일할 40~60대 ‘청년들’에게 노년을 대비해 “체력에 맞는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라”고 권한다. “팔순이라니까 피트니스클럽 코치가 깜짝 놀라던, 그런 즐거움을 누리기를 바라요. 일단 건강한 몸 상태를 유지하면서 무엇을 할 것인지 찾아야죠.”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