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저질이기에 찍어준다는…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인 체제이므로 당연히 국민의 의식과 지력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그리스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한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명백하다. 문제는 뽑힌 자와 뽑는 자의 대응성(correspondency)이 선거를 거듭할수록 약화되고 있는 점이다. 선거는 국민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저질적 특성을 더 강하게 반영한다. 최악을 피하기 위한 고민을 말하는 것이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선거구민들은 의도적으로 저질을 뽑는다. 이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점점 일반적 경향이 되고 있다. 선거구민들은 저질 대표를 앞장세워 자신들의 숨은 의도를 추진한다. 루소는 국민은 선거일에만 자유롭다고 말했지만 이는 틀린 말이다. 민주주의 과잉사회에서는 선거구민들이 외려 대표를 갖고 논다.

의사들의 집회에서 대표라는 사람이 스스로 목을 찔렀던 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적지않은 충격을 주었었다. 다른 직업군도 아닌 의사가 그런 비정상적인 행동을 감행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의사들은 왜 그런 수준의 사람을 대표로 내세웠을까. 투쟁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자해공갈조차 감행할 수 있는 그런 저질 대표가 필요했던 것인가. 실로 의심스런 대표도 용도는 있는 법이다. 요는 저질이기 때문에 대표가 된다는 것인데 도처에 그런 대표들이 넘쳐나고 있다.

지성의 상징인 대학 총장을 선출할 때도 그런 사례가 많다. 자신이 직접 나서기는 뭐하지만 저 친구라면 교육부나 재단에 미친 짓이라도 해줄 것 같은 그런 특이성이 총장의 필수적 자격요건이다. 학자로 구성된 학회조차 학식과 품위가 아니라 외부용역 예산을 많이 끌어올 것 같은, 그리고 그런 자리조차 감투라고 굳게 믿고 있는 3류 마당발 인사들이 때론 대표자로 선출된다. 드러난 행동과 숨은 동기의 차이가 클수록 민주성은 파괴된다. 추대 아닌 선거의 구조적 부작용이다. 대표성도 그렇다. 유능한 의사일수록 의사단체 회장자리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기자 교수 변호사 등 전문직일수록 그럴 것이라고 보는 것도 자연스럽다. 전문직업인은 민주주의 아닌 직업과정 속에서 사회에 기여하는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런 직업군일수록 문제적 인물이 대표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다. 대표를 선출하는 거의 모든 조직·협회·단체는 그런 역선택을 천연덕스럽게 해낸다. 대표가 될 수 없는 자를 대표로 뽑는 선거는 한 번 이식되고 나면 결코 그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는 선거 집단의 비열성 때문이다. 그렇게 보편적 의사결정은 사라지게 된다. 국론은 찢어지고 여론은 분열된다. 구심력이 아닌 원심력이 극성을 부리는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보편적 관점이 아니라 집단적 이익이 판단 잣대가 된다. 나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네가 양보할 때까지 벼랑 끝 전술을 쓴다. 치킨 게임은 정상적 인간을 필연적 패배로 몰아간다.

연말 예산국회에서 비정상적 행동을 거듭하며 쪽지예산을 날려대는 국회의원의 행위는 곧잘 신문과 방송의 비판을 받는다. 고발 기사는 과연 정치인에게 타격을 줄 것인가. 타격? 천만의 말씀이다. 그 기사는 오히려 예쁘게 스크랩되어 지역구민에게 뿌려진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서까지 지역예산을 위해 진력하고 있다’는 증거자료다. 그렇게 저질 국회의원은 더욱 거물이 되어간다. 임명직에조차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상황은 이런 조건이 지속된 결과다.

우리는 내일 또 몇 명인가의 출마자들에게 도장을 찍어야 한다. 천국을 만들어 주겠다는 특이 인물들의 사진이 어지러이 선거공보 속에 들어 있다. 세금을 내본 적이 없는 인물조차 넘쳐난다. 저마다 뽀샵한 얼굴로 자신을 선택해달라고 아양을 떤다. 이게 한국 민주주의의 맨 얼굴이다. 여론조사에조차 정략적으로 응답하는 3류 정치프로들이 바로 한국인이다. 지난주에는 세월호 정부 자작극을 주장하는 음모론조차 국회 회의장을 장악했다지 않은가. 참 기발하게 저질스런 민주주의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