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북한이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중 최대 성과라고 강조하는 ‘보천보 전투’ 얘기다. 북한 교과서를 보자. 1937년 6월4일 밤 10시,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 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김일성과 최현 부대가 박달·박금철의 조국광복회와 함께 경찰관 주재소·면사무소·소방서·우편국 등을 불태우고 일제 군경을 전멸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김일성 무장항일 투쟁설의 대표적인 조작 사례로 온갖 억측을 낳고 있다. 훗날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을 지낸 이상조 씨는 당시 중국의 지원 명령을 받고 현장에 갔을 때 김일성을 찾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전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 씨는 “유격대가 뒤쫓아온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김일성 장군이 전사했는데, 이후 젊은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이름을 바꿔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

이명영 전 성균관대 교수는《김일성 열전》에서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은 1887년 태어난 일본육사 출신의 본명 김광서라는 사람”이라고 밝혔다. 소련에서 훈련받은 공산유격대 출신인 김성주는 소련군 로마넨코 소장의 각본에 따라 ‘김일성 장군’으로 변신했다. 1945년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에 참석했던 박인각 전 평안남도지사는 “스치차코프 점령군사령관이 33세의 젊은 그를 김일성 장군이라고 소개했으나 군중이 모두 믿지 않았다”고 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북한 외무성 국장을 지낸 박갑동 씨의 증언이다. 그는 “평양의 김일성 장군 환영식 사진을 보천보 전투에 참가했다 일본군에 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박달과 박금철에게 확인시켰더니 김일성이 아니라고 했다”며 일본측 판결문을 근거로 제시했다.

보천보 전투의 실상도 다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최근 번역된 일본 좌파 지식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의 《와다 하루키의 북한 현대사》는 당시 일본 순사 자녀 한 명이 유탄에 맞아 죽었고 일본인 식당 주인 한 명이 살해됐을 뿐이라고 했다. 이 사건 때문에 오히려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돼 조직이 궤멸됐다는 평가도 덧붙였다. 보천보는 순사가 5명밖에 없는 작은 마을(300여 가구)이었다는 것도 다 드러났다.

그런데도 북한은 보천보혁명박물관과 기념탑을 세워 우상화에 활용하고 있다. 오죽하면 김일성 가짜설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보천보 전투는 전투가 아니라 단순 습격 사건이라는데 말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