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기잡기'로 유명한 김과장, 알고봤더니 '軍 면제자'
철저한 上命下服 문화…남성 못잖은 금융사 여성군기
대기업 A사 기획팀에 근무하는 공익 출신 김 차장은 사내에서 ‘군대’ 얘기만 나오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기획팀 남자 직원 중 공익 출신은 그가 유일하다. 문제는 기획팀에 유독 학군단(ROTC)을 비롯한 장교 출신과 특전사, 해병대 등 군대에서 한가락 하던 직원들이 많다는 점이다.
이렇다 보니 기획팀의 규율은 군대와 비슷하다. 사소한 일 처리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당장 사표 써’라는 상사의 호통을 들어야 한다. 업무가 늦어지는 이유를 설명해도 ‘무조건 몇 시까지 해’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회식 자리에서도 단연 화제는 군대 얘기다. 김 차장은 회식 자리에서 왕따를 당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후배 직원들이 업무 시간에도 자신을 공익이라며 은근히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일 때마다 울화통이 터진다.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젊은 시절 누구나 경험하는 게 군대다. 2년여간의 군복무를 마친 이후에도 군대는 끝이 아니다. 아직까지 한국사회의 직장에선 ‘까라면 까라’는 문화가 남아있는 게 현실이다. 직장 내 군대 문화 때문에 울고 웃는 김과장 이대리들의 모습을 살펴본다.
상사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중견기업 B사에 다니는 이 대리는 사내에서 군기 잡기로 유명한 김 과장과 함께 일하고 있다. 후배 사원들은 “버릇없는 건 못 참는다”는 김 과장 앞에선 항상 깍듯해져야 한다. 김 과장은 “후임은 원래 힘든 것”이라며 “회사 생활은 ‘짬’(경력)을 먹어갈수록 편해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김 과장이 유독 군대 문화를 강조하면서 사내에선 그가 장교나 해병대 출신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최근 우연히 김 과장의 경력 서류가 공개된 이후 그가 군 면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다는 콤플렉스 때문에 더 군기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후배들 사이에서는 김 과장에게 ‘속았다’는 말이 퍼졌고, 새로운 대처법도 생겨났다. “이제는 김 과장이 군기를 잡을 때마다 ‘당신 군 면제잖아’라는 메시지를 은근히 전달하며 압박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일부러 그 선배 앞에서 군대 얘기를 더 자주 꺼내기도 하죠.”
중견기업 C사에 근무하는 K임원은 사내에서 ‘해바라기’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얼마 전 한 대기업에서 이직한 K임원은 C사의 조직 문화에 불만이 많다. 그는 항상 부하 직원들에게 엄격한 상명하복을 강조한다. ‘상사가 죽으라고 하면 부하는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고 닦달할 정도다.
C사가 대기업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상명하복 시스템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아서라는 게 K임원의 확고한 철학이다. 그는 최근엔 부하 직원들에게 ‘해바라기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일장 연설하고 있다.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직원들은 상사만 바라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K임원은 자신도 해바라기 정신으로 대기업에서 ‘별’(임원)을 달았다는 설명도 빼놓지 않는다. “요새는 시도때도없이 항상 해바라기를 강조하다 보니, K임원이 군복무를 어디서 어떻게 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직장에서 꼬이고 꼬인 군대 서열
대기업 D사 기획팀에 근무하는 강모씨는 최근 후배 신입사원을 받았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입사 후 2년가량 혼자서 팀 막내 역할을 하던 강씨는 얼마 전 후배가 입사한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다. 커피 복사 등 잔심부름을 혼자 도맡아 하던 그였다. 후배 신입사원에게 고참으로서 군기를 잡겠다고 다짐까지 했다. 그러나 강씨는 얼마 후 신입사원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신입사원은 군복무 시절 사단본부에서 함께 근무한 직속 고참(맞선임)이었던 것이다.
군복무 당시 사단본부의 규율이 엄격했던 탓에 강씨는 신입사원의 얼굴을 보자마자 ‘앗! 김 병장님 아니십니까’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군기가 바싹 들어 있던 신입사원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강씨와 맞선임은 나이가 동갑이지만 맞선임이 늦게 졸업한 탓에 직장에선 선후배가 바뀐 것이다. “앞으로 후배 신입사원을 오히려 모셔야 할 상황이 돼 버렸습니다. 군대 인연이 꼬여도 어떻게 이렇게 꼬일 수가 있나요.”
눈물 쏙 빼는 여성의 서열문화
군복무를 한 남성들만 군기가 센 건 아니다. 금융사의 여성 군기는 남성 못지않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특히 시중은행의 경우 창구 담당 여직원이나 총무 업무를 맡고 있는 여직원들 간에는 선후배 관계가 확실한 편이다.
광화문에 있는 한 금융사에 근무하는 한 대리는 입사 초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 대리가 근무하는 부서 직원들은 대부분 남성이어서 상명하복식 군대문화가 익숙한 편이다. 상사의 무리한 지시에도 그대로 따르는 분위기다. 부서 업무가 창의적인 작업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회계 등 숫자를 다루는 부서라 부작용도 적은 편이었다. 이런 회사 분위기 속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성 동료끼리도 보이지 않는 서열 문화가 확실해졌다.
맏언니 격인 여성 상사가 얘기하면 주로 후배들이 따르는 식이다. 점심을 어디서 먹을지, 점심 후 커피는 어디서 마실지를 고를 때도 서열 문화가 작동한다. 당시 갓 입사했던 한 대리는 이런 회사 분위기를 모르고 여성 동료들끼리 점심을 먹으러 갈 때 고참 과장이 제안한 메뉴를 싫다며 다른 메뉴를 추천했다. “아직까지도 기억이 생생해요. ‘그 메뉴는 오늘 날씨에 별로인 거 같아요’라고 말하는 순간 분위기가 싸해지더라고요. 과장의 표정은 굳어졌고요.”
유통업계에 여성들의 진출이 늘어나면서 여성 간 경쟁이 치열해졌고, ‘오히려 여자 상사가 더 무섭다’는 얘기들이 심심찮게 나온다. 백화점에 근무하는 워킹맘 박 과장은 남성 직원들보다 여직원들을 더 엄하게 대한다. 치마가 과도하게 짧거나 지나치게 화려한 옷차림을 하는 여직원들이 주로 타깃이다. 남성 동료에게 애교를 부리고 친한 척하면서 사내 인맥 관리를 하는 여자 후배들도 마찬가지다. “행동이나 옷차림이 너무 튀면 어느 순간 자신을 대하는 여자 상사들의 태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이러면서 조직 분위기에 점점 적응해가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