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實事求是 리더십이 필요한 한국 대학
별 지구 탐사를 나온 외계인이 오랜 정찰을 마치고 모선에 보고를 한다. “나라마다 대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상한 물체, 아니 공간 여기저기에 퍼져 있는 기이한 구조가 있다. 매우 원시적이지만 활발한 에너지 레벨을 보이는 이 단위들은 나라가 클수록 더 크고 더 많이 퍼져 있고, 주위에 인간의 왕래도 더 활발하게 나타난다. 대학을 오가며 인간들은 연구와 교육, 사회공헌이니 하는 얘기를 하는데, 상대적으로 더 발전된 나라들은 이들 기구와 거기서 일하는 인간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자금이나 물질적 지원을 더 많이 제공한다. 인간들이 말하는 생산과 경제를 위한 공장 같은 설비들은 정작 다른 데 있는데 대학에 나라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들 말하는 게 신기하다. 지구 시간으로는 꽤 오래된 1000년 역사를 가진 이 낡은 기구가 인간계에서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학은 오래된 제도다. 대학의 기원은 논란이 없지 않지만 11세기 이탈리아의 볼로냐대를 꼽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고 보면 1000년 역사다. 인류가 만든 제도 가운데 1000년 넘게 살아남은 것은 그리 흔치 않다. 대학의 미래는 오래된 논쟁거리지만 대학은 적어도 역사의 지평 근처에 이를 때까지는 생명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대학이 1000년 역사를 뒤로 하고 계속 살아남았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확산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한 가지 해답은 대학이 인간과 사회에 관한 학문에 뿌리를 두고 미래를 향해 가지를 뻗어 나가는 나무 같은 존재상을 가진다는 데 있다. 인간과 사회의 길을 묻는 것은 1000년 넘게 대학이 해온 오래된 현재다. 인간 본성에 관한 한 1000년이 지나도 질문은 늘 동일하다. 그렇기에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 같은 스타는 학생들의 질문이 이미 수천 년 전 위대한 철학자가 했던 고민과 같은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서 흥미를 유발할 수 있었다. 대학은 여전히 그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문제들과 씨름하는 교수들과 학자들의 공간이자 생태계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존속할 것이다.

다른 게 있다면 오늘날 대학이 직면한 현실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 18세기 독일 괴팅겐대의 역사를 뒤적이다 보면 학생들이 파업을 하고, 그래서 떠나려는 대학을 교수들과 심지어 교수 부인들까지 뛰쳐나와 막아서는 놀라운 광경을 마주한다. 교수 수입이 시원찮아 학생 하숙을 치면서 수지를 맞춰 왔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 시절에도 삶이 녹록지 않았다는 얘기지만, 오늘날 대학이 처한 냉엄한 현실에 비하면 그저 정겨운 에피소드일 뿐이다. 대학은 구원의 물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늘 거꾸로 뿌리가 뽑힐지도 모르는 위기상황에 처해왔다. 가장 야멸찬 위기는 돈의 위기, 재정의 위기, 지속 가능성의 위기다. 사람들은 대학에 대해서도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하게 계산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오래된 문물, 대학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미래사회에서 대학의 생존이 대학만의 노력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누가 이끌 것인지는 중요하다. 대학을 이끌어 갈 총장을 선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고통스런 일이기도 하다. 거래비용도 막대하다. 그래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어떤 리더를 뽑느냐가 대학의 미래를 좌우하는 결정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 총장에 관한 한 영웅시대는 갔다는 게 불편한 진실이다. 이육사 시 ‘광야’에서의 백마 탄 초인은 이제 더 이상 오지 않는다. 시대와 사회를 앞서 이끄는 신비주의 지성의 리더십은 멸종위기종이 돼 버린 지 오래다. 우리는 대학 구성원들의 자존심을 살려 줄, 덕목을 갖춘, 그러나 재정혁신의 선순환구조, 대학재정의 지속 가능성이라는 귀에 솔깃한 키워드들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역량을 갖춘 현명한 실사구시의 리더십을 기다릴 뿐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힘과 리더십이 필요하다.

홍준형 <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joonh@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