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아버지를 업듯이 동생 박희권 대사가 열한 살 위인 형 박인구 부회장을 업었다. 형이 “생각보다 무거울 텐데”라고 하자 동생은 “꼭 한 번 업어 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피는 못 속인다’고 두 사람의 얼굴이 많이 닮았다.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아들이 아버지를 업듯이 동생 박희권 대사가 열한 살 위인 형 박인구 부회장을 업었다. 형이 “생각보다 무거울 텐데”라고 하자 동생은 “꼭 한 번 업어 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피는 못 속인다’고 두 사람의 얼굴이 많이 닮았다.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자고 나면 새로운 상품과 트렌드가 생겨납니다. 변화가 너무 빨라 자칫하면 정체성을 잃고 표류하기 쉽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힐링입니다. 굴곡진 현대사로 인해 힘들었던 성장기를 꿋꿋이 헤쳐온 형제들의 인생사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한국경제신문은 이를 위해 ‘형제의 대화’를 시작합니다. 박인구 동원그룹 부회장(68·왼쪽)과 박희권 주스페인 대사(57) 형제의 따뜻하고 가슴 찡한 인생사를 첫 번째로 소개합니다.

모두가 선망하는 지역 최고 명문 중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입학금이 없어 가지 못한 소년이 있었다. 눈물을 머금고 학비를 전액 면제해주겠다는 다른 학교에 들어가 고교 때까지 1등으로 졸업했지만, 대학 진학은 한참 뒤로 미뤄야 했다. 3남5녀의 장남인 그에겐 열한 살 아래 막냇동생이 있었다. 형은 투정을 부리는 동생에게 때로는 모진 회초리를 드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동생은 쓰라린 종아리를 비비며 겨울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영어 단어를 외웠다.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전화국에 다니다 뒤늦게 야간 대학에 들어간 형은 서른이 넘어 행정고시에 합격, 경제부처 관료를 거쳐 지금은 대형 식품업체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대학 재학 중 외무고시에 붙은 동생은 해외 주재 대사로 있다. 그는 해양법에 관한 책만 아홉 권을 낸 해양법의 국내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박인구 동원그룹 부회장(68)과 박희권 주(駐)스페인 대사(57) 형제 얘기다.

동생이 외국에 있는 탓에 1년에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이들 형제가 모처럼 자리를 함께했다. 박 대사가 임명장을 받기 위해 잠시 귀국했을 때다.

[형제의 대화] "형님은 제게 아버지…회초리 맞던 때가 이젠 그리움으로" "내 동생이지만 참 독한 놈…골프도 안치고 지금도 공부만"
두 사람이 만나자마자 꺼낸 얘깃거리는 ‘형제의 대화’ 주제치고는 꽤나 묵직한 것이었다. “스페인 대사로 부임하면 IUU 문제를 해결하는 게 첫 미션이 될 거야.”(박 부회장) “라스팔마스는 서대, 조기, 민어 같은 우리 국민이 즐겨 먹는 어종이 많이 잡히는 지역이에요. 국익과 동포들의 생업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집니다.”(박 대사) 형제는 스페인 라스팔마스 지역 한인들의 어로 행위와 관련된 IUU(불법, 비규제, 비보고 어로 행위) 문제로 한동안 얘기를 이어갔다. 형은 수산업을 모태로 성장해온 동원그룹의 CEO이고, 동생은 한·일 간 배타적 경제수역(EEZ) 협상에서 한국 측 대표를 맡았을 정도로 해양법 전문가이다 보니 대화에 막힘이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대화에 끼어들었다. “두 분 모두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고생을 많이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박 부회장이 먼저 말을 받았다. “아버님은 일제시대 때 소방서에서 근무하시다 해방 후 백범 김구 선생이 이끌던 한국독립당의 전남도당 조직부장을 맡으셨어요. 지금도 김구 선생이 보내신 서한이 집에 있지요. 당시 정당 활동이라는 게 수입이 전혀 없는 거잖아요.”

당연히 생계를 꾸리는 것은 어머니 몫이었다. “장터에서 행상도 하고 나무도 해 나르고, 할 수 있는 건 다하셨어요. 부농의 무남독녀 외동딸로 귀하게 자라셨는데, 정치 지망생에게 시집 와서 8남매를 낳고 키우느라 모든 걸 희생하신 분이죠. 그 당시 대부분의 ‘어머니’들처럼 질곡의 근현대사를 몸소 소화해내신 분이에요.”

[형제의 대화] "형님은 제게 아버지…회초리 맞던 때가 이젠 그리움으로" "내 동생이지만 참 독한 놈…골프도 안치고 지금도 공부만"
당시 그들의 가정 형편을 엿볼 수 있는 한 대목. 박 부회장은 광주 지역 최고 명문학교인 광주서중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음에도 입학금이 없어 조선대 부속중학교에 3년 장학생으로 간 뒤 조선대 부고까지 수석으로 졸업했다. 박 대사는 중학교 시절 수업료를 못 내 학교에서 쫓겨온 적도 있었다. 박 대사의 누나들은 일찍 학교를 그만두고 양재학원을 다녀 재단사가 되거나, 방직공장 등에서 일했다.

“그런 가정환경 속에서도 저희 8남매가 누구 하나 비뚤어진 사람 없이 모두 잘 컸다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에게서 경제적으로 물려받은 것은 없지만, 늘 배움을 강조하시고 꿋꿋하게 살라는 가르침을 주셨어요.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긍정의 마음을 버린 적이 없으시고요.”

이렇게 말하는 박 대사에게 큰형 박 부회장은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박 부회장은 조선대 부고를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전신전화건설국 9급 공무원으로 일하며 동생들의 학비를 댔다. 어린 박 대사에게 공부하는 습관을 들여준 것도 박 부회장이었다.

“형님이 제 독서를 지도하셨어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세 번이나 읽었죠. 독후감도 꼭 쓰게 하셨고. 어릴 때부터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듣고 백일장에서 상도 받고 한 것도 그 덕이죠. 형님이 계셨기 때문에 초등학교 때 반장과 학생 회장을 내내 할 수 있었어요.”

박 부회장은 그때를 생각하면 동생에게 매를 든 게 마음에 남아 있다고 했다. “동생들 많이 때렸어요. 집안 형편은 어려운데 자기들 욕심을 부리는 경우가 있었죠. 교복을 헌것은 안 입겠다거나 수학여행을 보내 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거죠. 설득하다 결국 매를 들 수밖에 없었죠.”

[형제의 대화] "형님은 제게 아버지…회초리 맞던 때가 이젠 그리움으로" "내 동생이지만 참 독한 놈…골프도 안치고 지금도 공부만"
박 대사에게 “야속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매는 상당히 맞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종아리에서 피가 나도록 맞은 적도 있고. 그래도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어요. 당시에는 울기도 하고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게 그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박 대사는 한겨울에 책상에 올라가서 옷을 뒤집어쓰고 공부했던 단상도 떠오른다고 했다. 체벌의 효과를 인정하는 그는 큰아들을 키우면서 중학교 때까지 매를 들었다고 했다.

박 부회장은 전신전화건설국에서 일하면서 교사시험에 합격했다. 서울에서 교직 생활을 하던 중 행정고시를 준비해 1년 만에 붙었다.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고시 공부를 하다가 주말이 되면 광주로 내려가 고시학원에서 아르바이트 강사로 일하는 치열한 삶을 살았다.

“일단 동생들을 돌보는 게 중요했지만 저 스스로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한 단계씩 차근차근 밟아 올라간 거죠. 인생에서 기회는 반드시 온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준비는 하고 있어야죠. 운도 열심히 준비하는 사람에게 따르는 것입니다.”

고된 생활 중에도 동생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박 부회장의 커다란 기쁨이었다. 박 부회장이 고교 교사를 하던 1976년, 박 대사가 한국외국어대 서반어학과에 입학했다. 박 대사는 대학 합격 후 ‘입학 등록금만 받고 그 다음부터는 손을 벌리지 않겠다’고 형과 약속했다. 박 대사는 한국장학재단 장학생으로 뽑혀 대학 4년간 장학금을 받았다. 형이 행정고시에 합격한 두 해 뒤인 1979년 동생도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사회에 진출한 뒤에도 박 대사에게 형은 인생의 본보기였다. “제가 런던에 근무할 때 한번은 유럽연합(EU) 상무관이었던 형님이 찾아 오셨어요. 백화점에 가신다기에 ‘무슨 남자가 백화점을 좋아하느냐’며 의아하게 여겼더니 상공부 공무원은 현장을 봐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게는 그게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늘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라 하시고, 공직자는 청빈해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세요.”

공교롭게도 형제가 모두 바다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박 부회장이 몸담고 있는 동원그룹의 모태는 원양어업이다. 박 부회장이 지금 가장 신경 쓰는 일도 2008년 인수한 미국 최대 참치캔 가공회사인 스타키스트 운영에 관련된 것이다. 박 부회장은 1997년 상공부 국장을 끝으로 공직을 떠나 손위 처남인 김재철 회장이 이끄는 동원으로 옮겼다.

박 대사는 외교관으로서 2005년 제11차 국제해저기구 이사회 의장을 맡는 등 국제적으로 해양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 과정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해양법 등에 관한 책을 아홉 권 썼다. 박 부회장은 “법률적인 문제나 외국 현황 등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동생에게 물어본다”고 했다.

국제회의 영어도 박 대사의 전문 분야다. 그는 각종 국제회의 전문 5000쪽을 분석해 2005년 ‘국제회의 영어’라는 책도 냈다. 박 부회장은 이런 동생을 두고 “이 놈은 참 독한 놈”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골프도 치고 직원들과 사교도 하라고 타이르는데 맨날 공부만 한다”는 게 형이 동생에게 느끼는 안타까움(?) 중 하나다.

이 대목에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영어교육으로 이어졌다. 박 대사는 “소득 격차에 따라 영어 교육 수준에 차이가 생기고 이것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낳는 ‘잉글리시 디바이드(English devide)’가 있다”고 했다. 그가 재미동포 2~3세 대학생을 도서·산간 지역에 보내 어린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도록 하는 ‘토크(TaLK)’ 프로그램을 정책으로 건의하고 출판사에서 받은 인세를 벽지 아동의 영어마을 비용으로 기부하는 것도 잉글리시 디바이드를 줄이자는 취지에서다. 박 부회장은 “해외 상무관 생활까지 했어도 영어실력이 부족하다는 걸 느낀다”며 “영어를 제2공용어로 하는 걸 검토해 봐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두 사람은 열한 살 터울의 형과 동생이 어린 시절엔 나누지 못했을 농담도 주고받았다. 박 부회장이 “내가 젊었을 때 광주에서 잘나가는 정치·경제 선생이었다”며 “요즘 유명하다는 입시 강사들의 강의도 들어봤는데 내가 낫겠더라”고 하자, 박 대사는 “형님은 지금도 ‘훈장끼’가 있어 말이 많지 않으냐”고 김을 뺐다. “나도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 삼아 한 과외로 영어 명강사 소리를 들었다”며 “‘정통종합영어’를 100번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의했고 그게 외교관 생활의 영어 밑천이 됐다”는 말도 덧붙였다.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부탁하자 박 부회장은 “현재를 고정된 상수로 보지 말라”고 했다. 그는 “현재는 변수이고 모든 것은 변화한다”며 “꾸준히 준비하면 기회는 온다”고 강조했다. 그 자신의 인생에서 터득했을 법한 말이다.

박 대사는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라는 괴테의 말을 들어가며 “젊은이들이 개성을 가졌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방향을 보고 속도전을 펼치기보다는 다양한 목표를 갖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기성세대가 도와줘야 합니다.”

유승호/강진규 기자 usho@hankyung.com